2009. 12. 27.

시51편 다윗의 선택:회개

2009. 12. 20.

히11:24-26 모세의 선택 : 고난








2009. 12. 13.

창45:3-8 요셉의 또다른 선택 : 용서

2009. 12. 6.

창39 1-20 요셉의 선택 : 순결

2009. 11. 29.

눅17:11-19 한 병자의 선택 : 감사

2009. 11. 22.

룻기 1:16-22 룻의 선택 :믿음

2009. 11. 1.

요3 16 가장 아름다운 선택


누군가 인생은 B와 D사이에 C와 같다. B는 Birth, D는 Death, 그리고 C는 Choice를 말한다. 즉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어떤 선택은 후회가 없는 선택이 있고, 어떤 선택은 추한 선택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참 아름다운 선택도 있다. 이웃사랑축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은 무엇일까 묵상해 보았다. 그리고 인생의 수많은 아름다운 선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저는 요한복음 3:16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1.우리들을 사랑한 선택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세상을 사랑하사... 이것은 우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셨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셨다. 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람들을 끝장내 버리시는 것이다. 심판하고 파괴시켜버리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자신을 거스리고, 자신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셨다. 사람들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고, 더러워졌다. 우리들은 망가졌고 깨졌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셨다. 이것은 아름다운 선택인 것이다.

● 존 오트버그(John Qrtberg)는 그의 아름다운 책 「이유를 초월한 사랑」(Love Beyond Reason)에서 여동생의 봉제 인형 팬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그 인형은 탐스러운 머리를 잃었습니다. 팔 하나도 어디론가 사라졌죠. 말하자면 낡을 대로 낡은 헝겊쪼가리였습니다. 하지만 팬디는 여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었다. 그래서 가족끼리 여름휴가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팬디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오트버그의 아버지는 차를 돌려 캐나다로 되돌아갔다. 오트버그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가족이었습니다. 특별히 똑똑한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었지요. 그들은 호텔에서 종이에 씨여 세탁물 밑에 깔려 있는 팬디를 찾아냈다. “이제 막 세탁기로 들어가 운명을 다할참이었다." 가족들은 팬디를 왜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을까? 그 인형이 예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토버그의 어린 여동생이 그 인형을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내 동생을)사랑한다면 자연히 팬디도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흠이 있고 망가졌으며 구부러져 있을 때도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봉제인형이라 할 수 있다. 망가졌고, 헤어졌고,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한 이 하나님의 사랑, 아름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더 아름다운 얘기가 있다.

2.외아들을 준 선택

●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뒤에 있는 말씀처럼 독생자를 주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으셨다.

● 사랑의 정도는 그가 치루는 값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으셨다.

● 남태평양의 어느 한 섬에 조니 링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재빠르고 현명하기로 소문이 나서 주변 사람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조니 링고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니 링고가 결혼하게 되었다. 그 섬에서는 결혼할 때 여자 집에 암소를 한 마리 가져다준다. 신부 값이다. 암소 다섯 마리를 지불했다 하면 대단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니 링고는 아내를 위한 지참금으로 암소 여덟 마리나 지불하였다. 그런데 신부되는 마리타는 오히려 볼품없는 여자였다. 깡말랐고 구부정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다녔고, 못생긴 그런 여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 여덟마리의 가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사람들은 조니 링고가 이번 만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수근거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몇 년 후, 사람들 앞에 나타난 마리타는 너무나 매혹적인 여자로 바뀌었으며, 그 기품은 따를 사람이 없게 되었다. 마리타는 자기 남편이 자기를 소 여덟마리나 지불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기품있는 여인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 우리는 어떤 면에서 마리타와 같다. 우리는 볼품없고 사랑받을 만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마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깝지 않은 것 처럼 독생자를 내어주셨다. 그분은 그분의 최고를 내어놓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분의 최고를 내어놓고 독생자를 내어놓는 선택, 분명 아름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 그래서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처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

● 그렇다면 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앞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까?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 요한복음 3;16은 말한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선택은 믿음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이다. 바로 믿음이다.

3. 그를 믿는 선택

●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 말한다. 누군가 믿음을 <왕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거지의 손>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왕 앞에 선 거지와 같다. 왕이 거지에게 선물을 주고자 했다. 거지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요, 나라를 위해서 공헌을 세운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왕은 거지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고자 했다. 왕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거지의 손은 깨끗하지 못한 손일 수 있다. 더럽고 추한 손일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어 왕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이미 용서해주셨다. 독생자를 보내셨을 때 이미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용서를 결정하고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미 용서해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신 것이다.

● 이것은 마치 탕자의 아버지와 같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어떤 집에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나갈 때 그냥 나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제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흥청망청 다 탕진해버렸다. 돈이 없으니까 남의 집 돼지를 치면서 나무 열매로 배를 채워야했다. 너무나 비참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 아버지 집 종들도 자기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직 집에서 멀리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고 맨발로 달려가서 아들을 맞이한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아버지의 사랑 앞에 아들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준 재산을 다 탕진했으니까 어떻게든 내 힘으로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절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일까? 실제로 많은 종교인이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 자기가 저지른 짓을 자기가 만회해보려고 한다. 조금이나마 아버지가 기뻐할 만한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고 뭔가 아버지께 가지고 갈 선물이라도 준비해갈려고 한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뭔가를 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선물을 마련해가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대신에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

● 그러나 이 아들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은 빨리 아버지께로 나가는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용서를 믿고 나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돌아가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최선의 선택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라, 믿음으로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라.

● 믿는 자에게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이것이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 우리의 젊음도 사라지고, 돈도 사라지고 명예도 사라진다. 이땅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풀처럼, 꽃처럼 잠시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화살이 날아가듯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시편기자는 인생은 입김이라 했고, 전도서에서는 안개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인생의 희노애락에 울고 웃는다.

● 분명한 것은 사람은 이것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짧은 인생만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영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지어진 존재이다. 영원을 위해서 지어진 존재는 결코 짧은 인생살이로 만족할 수 없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있고 값나는 것들이 많이 있어도 결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스타크래프트를 경험한 사람은 결코 겔로그로 만족할 수 없다. 한국의 빠른 인터넷을 경험한 사람은 56k 모뎀으로 하는 인터넷으로 만족할 수 없다. 잘 차려진 일급 요리를 경험해 본 사람은 싸구려 샌드위치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1급 휴양지에서 보내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동네 진흙탕에서 노는 재미에 만족하지 않는다.

● 사람은 이 땅의 그 어느 것으로도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이 땅에서의 모든 기쁨은 영생의 기쁨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한 것이다. 분명 돈의 행복이 있고, 오락의 행복이 있고, 가정의 행복이 있고, 술의 행복도 있고, 취미생활의 행복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표지판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들은 잠시 기쁘지만 영원히 기쁘지 않다.

●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하셨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전도는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생의 기쁨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초청하고 주께 인도하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인 것이다.

● 그래서 찬송가의 작시자는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270장)라고 하지 않았는가?

● 이 찬송가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침례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그런 분이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특별한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분이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가 508(270)장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 그런데 그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이 아닌 훌 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된다. 더 이상 돈은 못 벌고 인간적인 대접도 못 받게 되었지만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침례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 목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목사되신 것 후회가 안되시느냐고? 목사 안되시고 의사하셨으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실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캐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뭄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난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모습이 아닌가?

2009. 10. 25.

빌 4:10-20 우리는 거꾸로 삽니다.


기독교에는 많은 역설적 진리를 가르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대접하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으리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리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 ‘우리가 약할 때가 오히려 강할 때이다’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도 일종의 역설적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얻는 데서 찾고 소유하는데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정반대의 길에서 기쁨을 찾았다. 바로 나누어주고, 드리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진정한 기쁨은 나눔에 있고, 주는데 있고, 베푸는데 있다는 진리를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다(행20:35).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기쁨의 길이다. 이것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요, 우리의 걸어야할 길이다.

그렇다면 나눔은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가?

1. 나눔은 참여의 기쁨을 준다.

바울이 개척하고 섬겼던 교회가 꽤 많았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교회는 바로 빌립보 교회였다. 14-16절을 보자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은 선교사였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이 일은 성도들의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지만, 물질적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때때로 텐트만드는 일로 물질적인 필요를 충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물질을 함께 나누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길은 많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기도이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한가지 길은 기도이다. 우리가 매주일 예배 전에 기도정병단 모임을 시작했다. 여러분 여기에 많이 참여하시라. 우리가 교회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교회에서 직접 봉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부엌봉사에 참여하고 안내 봉사에 참여하고 기도순서에 참여하고 영상 음향봉사에 참여하고 찬양봉사에 참여하고....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물질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여러 가지 제목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기회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받고, 너희가 내 일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봉사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물질을 주 앞에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헌금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길은 아니다. 내 주변에 어려운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실 것이다. 이들을 양과 염소라고 표현하셨다. 양의 무리가 있고 염소의 무리가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가르셨는가? 먼저 양의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사람들은 의아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 염소의 무리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똑같은 기준으로 말씀하셨다.

마25:41-43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모질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25:45-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베푸는 것이며, 예수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은 바울의 일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하나님을 동참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여러분이 호주 수상이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여러분을 참여시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것은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나라의 국사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당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하고, 물질적으로 드리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2.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준다

빌립보 교인들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할 때에 헌금문제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를 언급한 적이 있다.

고후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기서 말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는 그리이스의 마게도냐 주에 속해 있는 한 도시이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역을 위해서 열심히 헌금한 것은 이들이 풍족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들에게는 환난이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는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풍성한 연보(헌금)을 드렸고, 힘껏 드렸고, 힘에 지나도록 드렸다고 바울은 증언한다.

우리가 많이 목격하는 바지만, 돈이 많다고 기부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다. 아마도 이민생활하고 유학생활을 우리들의 빠듯한 경제사정보다도 더 가난한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환난이 있고 시련이 있고 가난 속에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다.

다시 빌립보서 4장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자기 생활에도 힘겨운 이들이 풍성하게 헌금하고 나누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하나있었다. 바로 19절 말씀이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다. 이 약속은 바로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물질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헌신적으로 드리면, 누가 우리 생활을 책임지는가? 하나님께서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는 이 약속을 믿는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일을 구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저희는 목회를 하면서 제 첫목회지에서 얼마되지 않았지만, 저희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재산이었던 전세금 등을 교회를 위해 드렸다. 그러나 이제까지 저희가 생활하면서 밥굶어본적 없고,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딱히 못해본 것도 없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라는 얘기가 아니니까 겁내지 마시라.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부자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풍성하게 주님께 드려보라. 이웃들에게 나눠보라. 그리고 지켜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시나 안하시나 지켜보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가 하나님께 드릴 때, 그리고 이웃들과 물질을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을 경험하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신다. 네 아들, 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네가 100세에 낳은 아들, 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저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저지하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 그리고 산 저쪽에 보면 어린 양 하나가 있는 것을 보게될텐데, 그 양을 잡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산 저쪽에서 양 한마리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이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나보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아끼고, 우리가 애착을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나볼 수 있는 하나님이다.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알게한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주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내 삶을 인도해주신느 삶을 경험하게 해준다.

3. 하나님께 사랑을 드리는 기쁨을 준다.

나눔은 돌려받는 기쁨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이 전부인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사랑을 주는 기쁨이다. 물질을 이웃에게 나눔으로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기쁨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나눔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바로 사랑 자체를 주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주는 기쁨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혹은 이웃들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우리의 물질을 나눌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축복하시고 채워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그냥 사랑을 주는 것이다. 물질을 드림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기쁨, 물질을 드려 내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기쁨, 물질을 선교사에게 보냄으로 그냥 복음 자체를 사랑하는 우리의 기쁨이 있다. 이것을 드림으로 받는 이들이 기뻐한다면 그게 우리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사들이 격려를 받고 힘을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8절을 읽어보자.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했던 것 같다. 이것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말한다. ‘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우리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 아니겠는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미소지으셨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아니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받지 못한다 해도 내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위해 살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니엘이란 사람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정복되어 많은 인재들이 잡혀갔는데, 거기에는 다니엘도 있었고, 믿음 좋은 그의 세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듯이, 이 세친구들도 왕의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강요를 받았는데, 이들은 신앙 때문에 이를 거부했고, 체포되어 왕 앞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석에서 왕은 이렇게 말한다.

단3:14-15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그러자 이들은 담대히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7).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그렇게 하니하실지라도...” 저는 결국 우리 신앙이 여기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시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듣고 싶은 고백아니겠는가?




2009. 10. 18.

빌4:6-9 샬롬의 길














빌4:6-9 샬롬의 길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샬롬이란 뜻은 평화란 뜻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호주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바에 비하여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지만, 그 나라의 역사는 꽤 길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이 약 BC 2500년경의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5000년쯤 되는 셈이다. 그 긴 역사에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했다. 모세의 영도하에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면서 부터 이들은 전쟁을 겪어야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과 전쟁을 일으켰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했다. 가까이는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족속들과 늘 싸워야했고, 주변의 강대국인 아람제국, 앗시리아제국, 바벨론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제국, 로마 제국 등의 침략을 차례대로 겪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전체 땅은 우리 나라 강원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작은 나라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단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평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 마다 ‘샬롬’이라고 인사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뜻이다.

한국도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 한국은 이제까지 약 900번 정도의 외침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사말도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인데, 안녕이란 말은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요, 히브리어로 바꾸자면 샬롬이란 말이다.

오늘 성경은 평화를 말한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평강이란 한자어는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다

9절에서도 평화란 말이 나온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 말하고, 9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쓰이는 이 평화란 말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깊은 뜻이 있다. 바울사도도 편지할 때마다, 인사말로 두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바로 은혜와 평화란 말이다. 그는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말이 은혜란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다. 우리는 우리가 업적이 많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편지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평화란 말도 은혜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왜 바울은 평화를 그렇게 중요시여겼을까?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평화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아니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평화를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샬롬의 길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인류가 범죄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졌다. 인간의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평화스러운 관계를 깨뜨려버렸다. 우리 모두는 다 범죄하였고, 우리의 죄로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죄가 있는 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하는 공의로운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거룩함도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니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은 인간 대신에 자기 아들을 심판하시기까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인간은 범죄했다. 평화는 깨졌다.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는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인 이리안자야에는 식인종이라고 알려진 사위 족속 부락을 전도한 선교사이다. 자신의 선교경험을 ‘화해의 아이’란 제목으로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선교하려는 사위부족은 워낙 싸움을 즐기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족속이라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배반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보다 가룟 유다를 더 받아들이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선교사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전통의식을 바라보다가 아주 멋진 영감을 하나 얻었다. 이들에게는 두 부족이 싸우다가 한 부족이 지면 진 부족의 추장이 자기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치름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선교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생각해 냈고 그 의식이 행해질 때 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평화의 아이를 주셨으니 이는 아이가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 평화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로마서 5:10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적군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화해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의미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하나님과 등돌리고 살던 모습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뜻이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에 대해서 말한다. 오늘 성경본문 7절이 바로 그 말씀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이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바이다. 이구절 앞에 6절을 보면 우리가 이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염려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은 늘 염려할 거리들이 많다. 요즘에는 숱한 보험이 있다. 보험의 종류만 해도 수백가지가 넘을 것이다. 건강에 대해서도 염려할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의 큰 염려거리가 아닐 수 없고, 젊은 형제 자매들은 특히 미래의 삶에 대해서 큰 불안과 염려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민사회는 더 불안하다. 수시로 변하는 이민정책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솔직히 너무나 많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 눈앞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울고싶은 상황인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는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기도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것이 막혀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기도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기도대신에 염려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까 염려가 우리 삶의 습관이 되었다.

Walter Cavert란 분이 염려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44%의 염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염려이다.

30%의 염려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12%의 염려는 건강에 대한 쓸데없는 염려이다.

10%의 염려는 아주 사소한 것들,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한 지나친 염려들이다.

오직 8%만이 염려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염려하는 경우라 했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얼굴 속에는 늘 근심이 있다. A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웃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 B를 가지고 염려하기 시작한다. B가 해결되면 이 사람이 행복해할 것 같은데 곧바로 C를 가지고 염려한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한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평화를 주신다. 괴로운 상황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주신다. 울고 싶은 환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 평화를 맛보셨습니까? 이 평화를 누리십니까?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이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중세기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봉쇄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아마 밤새 산에 오른 것 같아 문을 열어 주면서 묻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그가 바로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명한 명작인 신곡(Divine Comedy, La Divina Commedia)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신곡을 꼭 단테가 인간 사후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신곡에서 그가 여행한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의 체험은 바로 여기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삶 그 자체의 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마다의 길에서도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지옥인가요, 연옥인가요, 낙원인가요? 물론 저는 연옥이라는 사후 세계는 비성경적이라고 믿지만 오늘의 우리의 지금의 영적 상태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인 상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그가 인생의 전반전에 경험한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 평화를 찾아 헤맨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두 가지 상처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아홉 살 난 소년의 영혼의 창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지나간 소녀 베아트리체, 그녀는 9년 후 한번더 그의 곁을 스치면서 그의 가슴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지만 그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나가 그의 가슴에 이룰 수 없는 비련의 상처를 남깁니다. 단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그의 아름다운 고향 ‘꽃의 도시 피렌체’가 정쟁의 도시가 되면서 그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귀향의 꿈을 그리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 비평가는 이런 사랑의 상처와 고향의 상처가 단테로 하여금 영원한 순례자가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방랑자 단테는 마침내 그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해 그이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친 신곡의 드라마 그 영혼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된 다음해(1321년,56세 되던 해) 그는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인도한 주님의 품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발견하고 눈을 감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그의 영원한 사랑을 만난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모든 것 속에 있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안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순례자 단테는 정욕의 추구로도 도덕으로도 정치로도 찾지 못한 그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마침내 그리스도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어도 비극의 주인공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거룩한 희극’(Divine 'Comedy'-tragedy의 반대라는 의미로)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천국이 그의 영혼에 임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체험한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영혼의 평화가 있는가?

셋째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길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더 한걸움 나가서 이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이 평화를 곳곳에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대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이 가면 그곳이 더 평화스러워집니까? 아니면 더 시끄러워집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 구절은 두가지로 표현한다.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졌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예수 믿어 변화되었지만,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옛 성품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혈기 때문에, 우리의 질투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시기 때문에 내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이 고통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시험에 들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기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한계가 있다.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예수님과 함께 간다면, 평강의 하나님가ㅗ 함께 간다면 그곳은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면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으로만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면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길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다.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쉬운 공식을 주지 않는다. 내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 8-9절 말씀을 읽어보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화평케 하는 길은 내가 먼저 주님과 동행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든지.

평화의 기도/聖프란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2009. 10. 4.

빌4: 4-7 항상 기뻐하라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재미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교회당이 아니라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잔치자리에 자주 참여하셨다. 오늘 우리는 추석을 맞이해서 야외에서 예배를 드린다. 내가 믿기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의 잔치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물론 인생에는 괴로움도 있고 고단함도 있다. 슬픔도 있고 시련도 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태도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는 것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는 기쁨이어야 한다. 감사이어야 한다. 단지 인생을 억지로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항상 기뻐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마음에 슬픔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첫째로 주님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4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했다. 세상의 기쁨은 주변환경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환경을 뛰어넘게 만든다. 내 주변환경은 어둡고 힘든대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주체하지 못할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주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 기쁨을 주신다.
둘째로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5절 말씀에 사람들을 <관용하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혼자만 즐겁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내 기쁨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내가 짜증나면 사람들을 대할 때도 짜증난다. 그런데 내가 기쁘면 사람들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좀 실수해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다. 내가 기쁘면 남을 대할 때도 기쁘게 대할 수도 있다.
셋째로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이 다 잘풀리는 것은 아니다. 6절 말씀을 보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만큼 염려할 것이 많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염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염려, 대학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이민생활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노후생활에 대한 염려... 많은 염려가 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은 늘 마음이 우울할 수 밖에 없다.
Dr Walter Cavert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 40%의 염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40%의 염려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 12%의 염려는 건강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들이다.
● 10%의 염려는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이다.
● 8%의 염려만이 진짜 걱정해야할만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염려할 거리가 없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염려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교회일만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생활 모든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내가 대학 전공을 결정하는 것에도 관심을가지신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란 무엇인가? 쉬운 말로 하면 인간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평강이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응답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 이상을 가져온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강을 경험한다. 기쁨을 경험한다. 요한복음 16:24에서 말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이 기도의 약속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가 많은 세상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2009. 9. 27.

빌3:18-21 1+1+1=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사람들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사라지는데, 그 지하실에는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있다. 그 문 앞에는 수수께끼 질문이 나오는데, 그 질문은 성냥개비 6개로 정삼각형 4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1+1+1=1로 했다. 여러분, 사실은 천국의 문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 어떤 분은 오늘 목사님이 무슨 이상한 얘기를 하시려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공식이다. 이 수수께끼는 빌립보서에 숨어있고, 여러분은 빌립보서에서 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 한가지 힌트를 드린다면 이 수수께끼는 ‘구원’이란 말과 관련이 되어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1+1+1+1이라는 공식의 각각의 1은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알아야 한다. 각각의 1에는 하나님 세가지 약속이 숨어있다.

첫 번째 1은 빌립보서 1:28-29에 숨어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 28절에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신앙의 핵심은 구원체험이다. 종종 교회생활을 오래하면서도 전혀 구원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구원체험이 없으면 사실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다시 말하면 내가 구원체험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가 상관없이,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랫동안 다녔는지 상관없이, 내가 얼마나 교회에서 봉사했는지 상관없이 이 구원체험이 없이는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다.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이 구원체험이 있었는가? 당신은 구원받으셨는가?

●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생은 고달프고 눈물나는 세상이다. 이민생활도, 유학생활도 만만치 않다. 어떻게 기쁘게 살 수 있는가? 환경만 바라보고는 절대로 기뻐할 수 없다. 사람만 쳐다보았다가는 여러분은 피눈물나는 실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전혀 다른 기쁨이다. 이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구약의 다윗은 이것을 <구원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체험이 먼저 있어야 한다.

●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구원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빌립보서 1장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1장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구원체험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말은 다른 말로 ‘선물’이란 말이다. 선물을 값없이 받는 것이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돈을 내야한다면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첫 번째 깨달아야할 것은 구원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선물이다. 영생은 선물이다.

● 여기에 첫 번째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영생은 선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공로를 쌓아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 이것이 첫 번째 1이다. 잘아는 말씀이지만 다시한번 인용하고 싶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두 번째 1은 빌립보서 2:12-13에 숨어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여기서도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1장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이 구원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 태어나는 출생과 같다. 어느 한 시점에서 내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극적으로, 어떤 사람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깨달아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지고,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오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1장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 그런데 2장에서는 구원은 조금더 폭넓은 뜻으로 쓰인다. 2장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예수님을 다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내 말과 내 행동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나타날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구원은 반드시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구원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연결되지 않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향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은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내가 받은 구원은 평생에 걸쳐 예수님을 닮게 한다. 그러므로 2장에서 말하는 구원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점진적인 과정이다. 오랫동안의 마라톤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맞고,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말도 맞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죄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 순간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평생걸린다.

●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이런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해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변할 수 있을까? 종종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절대로 안변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나는 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면 나는 변할 수 있는 줄 믿는다. 그런데 13절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내 속에 있으면서 나의 변화를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말씀이다.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까지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희망을 갖는다.

● 여기에 대해서 짧은 영상물이 있는데, 함께 보자.

­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다. 3불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을 닦는다. 그리고 핸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을 황홀하게 한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회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만에 너를 만졌구나."하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고, 결국 이 바이올린이 3천불에 낙찰된다는 내용의 시이다.

­ 무엇이 이 변화를 일으켰는가? 바로 바이올린의 거장의 손을 거쳤을 때 3달러짜리 인생이 3000불 짜리 인생이 될 수도 있고, 3천억불의 인생으로도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그 거장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고 그 손으로 우리를 다듬기를 원하신다. 그 예수님의 손길 가운데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세 번째 1은 빌립보서 3:20-21에 나와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여기서도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1장에서는 구원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2장에서 구원이란 한 평생 걸려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3장에서는 구원이란 언젠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21절에 나와있는데, 우리 몸이 예수님 몸처럼 변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낮은 몸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것은 이 땅에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래에 되어질일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 여기서 우리 몸을 <낮은 몸>이라 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병에 걸리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약해지기도 한다. 이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고뇌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여전히 질투하고 욕심내며, 여전히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그분을 닮아가도록 일하시고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낮은 몸>의 신음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완전한 천국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내 속에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불뚝불뚝 튀어나오기도 한다.

● 이땅을 살면서 인간의 낮은 몸을 가지고 살기에 인간 사이에 소통되지 못하는 불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서로를 의심하고 오해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해서 한 순간에 마음이 돌아서기도 한다.

● 어느 노부부 이야기

­ 어느 60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차이로 이혼을 했다. 이혼하는날 그 노부부는 이혼 처리를 부탁했던 변호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다. 통닭이 나오자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찢어 할머니에게 권했다. 함께한 변호사는 그 모습이 워낙 좋아 보여서 어쩌면 다시 화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가 기분이 아주 상한 표정으로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 30년 간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 하는 날까지도 이러다니, 난 다리 부위를 좋아한단 말이야”

­ 할머니의 그런 반응을 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 날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삼 십 년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 하는 날까지...?”

­ 화가 난 노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자꾸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나는 한번도 아내에게 무슨 부위를 먹고 싶은가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주면 좋아하겠거니 생각했지, 내가 잘못한 일이었던 것 같아. .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할아버지가 건 전화임을 안 할머니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할머니는 아예 배터리를 빼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이 깬 할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삼 십 년 동안 남편이 날개 부위를 좋아하는 줄 몰랐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준건데, 그 마음을 모르고 내가 화만 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아직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인데”

­ 이렇게 생각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안받아서 화가 났나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할아버지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 핸드폰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 미안해’ 사랑해‘

● 이것이 이 땅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인생의 한계이다. 결혼을 시작할 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을 가지고 시작하는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의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 그러나 약속이 있다. 언젠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 우리 몸은 이 땅의 몸이 아니라 천국의 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조그마한 일로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2009. 9. 20.

빌3:10-21 푯대를 향하여

빌3 10-21 푯대를 향하여

인생을 살아가는데 선배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나를 붙들어주고 충고해주고 안내해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멘토, 인생코치라고도 한다. 그런데 단지 말로만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보여주고 본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v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많은 영역에서 본을 보였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비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푯대>라고 말한다. 요즘은 달리기 경주의 마지막지점에 테이프로 들고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지만, 예날에는 골인지점에 하나의 푯대, 하나의 깃발을 세워둔다. 경주자들은 그 깃발을 바라보고 달렸다. 바울은 자기 인생에는 분명한 푯대가 있다고 했다. 모든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에게는 비전과 꿈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전과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통해서 꼭 이루고 싶은 푯대가 있었다. 그러나 말로만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비전과 푯대를 향해 전심전력으로 달렸다고 말한다.

12-13절은 끝날 때 마다 “달려가노라...달려가노라”라고 말한다. 그는 종종 인생을 달리기로 묘사했다.

고전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전과 꿈이 없이 살아간다. 그냥 안주하며 살아간다. 자칫잘못하면 이민생활은 비전과 꿈의 무덤일 수 있다. 더 이상 추구하는 목표도, 비전도, 꿈도 없이 그냥 삶에 편안하게 안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민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 이민생활에 안주하지 않게 해달라고..그저 자녀들이나 잘키우는게 꿈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비전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꿈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인생이 달리기라면, 달리기를 포기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자기가 이미 그 목표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아무리 뛰는 것을 좋아하고, 잘 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뛰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이미 목표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뛰지 않을 것이다. 골인지점에 와있는데 뭐하러 뛰겠는가? 절대로 안움직인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달리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말했다. 12-14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자기가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목표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쓴 사람이었다. 로마 전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웠던 사람이다. 디모데와 디도를 비룻하여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양성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견줄만한 사람이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람들이 왔다고 말했다. 어떤 영어성경 번역에는 이 사람들은 세상을 upside down 시키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이만큼 바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이룬 줄로 생각하지 않는다. 목표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차선이다. 작은 성공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큰 성공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이룬 자그마한 성공에 도취되어 있으면 나는 안주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작은 성공에 만족하는 사람은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이다. 미국 시카코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는 비전을 이렇제 정의했다. 비전은 거룩한 불만족이다. 비전은 거룩한 불만족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작은 성공이라는 미끼를 주어서 정말 뛰어야할 치열한 전쟁터에서 놀고 먹게 만든다. 진짜 전쟁은 오지 않았는데, 지엽적인 전쟁에서 이룬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진짜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뭔가 열의도 열심도 헌신도 없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교회였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교회가 등장하고 그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다른 교회는 조금이나마 다 칭찬을 받는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칭찬받지 못했다. 이 교회는 “덥지도 차지도 않아서 예수님이 토해내고 싶은” 교회였다. 그런데 이 교회 사람들이 이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시록 3:16-17)

이 교회 사람들은 자기는 부자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가난하고 가력한고 곤고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일 수 있다. 우리의 실상은 눈멀었는데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난한데 부자라고 생각하고, 벌거벗었는데 옷입었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 만족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뒤에 것은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룬 작은 것들도 잊어야 한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바울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역하며 선교하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는 아직 이룬 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난 주에 묵상한 내용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이전에 자랑할 것이 많았다.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율법에 정통했고, 하나님께 열심이었고,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파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자기가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자랑하던 것이 배설물이요 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도 내세울 것이 없는 하잘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그가 만난 예수는 대단했다. 그는 유대학자에게도, 헬라문화에서도 자라났지만, 예수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가 가장 고상했다. 그래서 말한다. 나는 이 예수를 알고 싶다. 예수를 알고나니까 자기가 이룬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랑할 것이 많았는데,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그 예수를 더 알고 싶었다. 그 예수의 능력을 맛보고 싶었다. 그 예수와 동참하고 본받고 싶었다.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를 알고 싶었다. 이제 그의 푯대는 바뀌었다. 예수가 이제 그의 인생목표가 되었다.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영국에 알파코스라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죽어가는 영국교회를 살리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닉키 검블이라는 목사님은 스쿼시를 아주 좋아하고 아주 잘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목사님이 스쿼시를 치고 있는 현장에 세계적인 스쿼시 선수가 잠깐 방문할 일이 생겼고, 함께 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경험을 닉키 검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쿼시를 잘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선수와의 짧은 게임을 통해서 내가 발견할 것이 있다. 나는 스쿼시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경력을 자랑할 줄 모른다. 우리가 좀 뭐했다는 것에 만족할 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예수를 만나보라. 그러면 당신은 결코 만족이 되지 않는 배고픔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알고 싶다. 예수를 더 만나고 싶다. 예수를 더 체험하고 싶다. 이 예수를 본받고 싶다. 이 예수와 더 친해지고 싶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갈증이요, 배고픔이다. 아직 이런 배고픔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감히 말한다. 여러분은 아직 예수를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말라. 예수를 위한 꿈을 가지라, 비전을 가지라, 예수 안에서 인생푯대를세우라. 그리고 그리로 달려가라.

어떤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동네의 공원을 갔다. 벤치에 앉아서 딸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아버지는 그 공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 동네 공원은 매우 지저분했고 깨끗하지 못했고 안전하지도 않다고 느꼈다. “이정도 밖에 공원을 만들 수 없는가? 아이들이 어떤 과학적인 탐구도 할 수 있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에서 미래의 꿈을 꿀 수 있는 어린이들만의 천국을 만들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이 아버지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이 아버지가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월트 디즈니가 가졌던 이 창조적인 불만이 바로 디즈니 랜드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인생은 달리기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달리기를 포기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적당한 성공에 만족하는 경우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주변 것들을 신경쓰느라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 오직 한일이라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한가지 일, 이것은 집중을 말한다. 태양은 따뜻하고 좋은 것인데,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면 종이도, 때로는 나무도 태운다. 이것을 고도로 집중시킨 것이 레이저 광선이어서 쇠로 된 것도 뚫는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동시에 100가지 일을 다할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1박2일이나 무릎팍 도사 같은데 나와서 별로 영양가 없는 얘기나 해대는 연예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데 절대로 나오지 않는 서태지같은 사람이 좋다. 가수는 노래로 승부해야하고, 배우는 연기로 승부해야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집중할 줄 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다. 여기서 달려가는다는 말은 <디오코>라는 말로 사냥개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갈 때 쓰는 말이다. 포수가 새에게 총을 써서 새가 어딘가 떨어지면 사냥개는 그 먹이감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거기에 온통 집중한다. 바울은 자기는 하나님이 주신 그 인생목표를 향해 그렇게 달려간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달리는 선수가 목표지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딴데 신경쓰면 우승할 수 없다. 우리를 산만케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배가 신이요, 땅의 일만 생각한다고 했다. 배가 신이라는 것은 먹는 것이 신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절대로 우리가 먹고 입는 것이 죄악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먹을 수 있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고, 좋은 집을 살수 있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 신이 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온통 우리의 관심의 전부가 되는 것이 문제다. 여러분, 한번 잡지를 보라. 음식, 옷, 화장품, 다이어트, 운동 등이 거의 전부다. 이런 것들이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우리 생각을 지배할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을 쳐다보느라고, 정말 우리가 쳐다보아야할 인생목표를 쳐다보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인생을 경주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선수가 땅만 쳐다보고 달리면 우승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우리가 목표삼아야할 것은 있다. 좋은 직장을 갖는 것,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목표일수 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는 것도 좋은 목표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예수회를 창설했던 익나티우스 로얄라(1491-1556)의 말은 인용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이 땅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이것들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는 한에 있어서는 다 사용할 수 있고,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면 이 모든 것들을 피해야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다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그 일을 하라. 원하는 직업, 직장이 있는가? 그것을 하라. 의사가 되고 싶으면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싶으면 변호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싶으면 정치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싶으면 음악가가 되라. 원하는 나라가 있는가? 그곳에 얼마든지 그런 나라에 갈 수 있다. 여러분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취할 수 있다. 다만 여러분이 창조된 목적을 잊지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여러분의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 의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엔지니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음악가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라. 그러나 절대로 음악가가 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목표라고 말하지 말라. 좋은 집사고 좋은 차 사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목표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비전을 갖되 더 높은 비전을 가지라. 대학 진학 이후의 비전을 가지라. 직장 너머의 비전을 가지라. 의사가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지 그 비전을 가지라.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 그것을 주님께 묻고 주님 안에서 그 소명을 찾으라.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하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달려갈 인생목표가 이 땅이 되면 여러분은 결국 후회하고 말 것이다. 이 땅은 지나가고 사람들은 변하고, 시대는 바뀐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이땅의 보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소명을 찾으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라.

척 콜슨은 하버드대학 출신이고,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고, 자신의 법률회사를 차렸고, 그리고 나중에 정치에 입문하여 40세에 닉슨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어 일하면서 King Maker 역할을 했다. 그리고 워터 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직전에 그는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된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그는 더욱 신앙이 깊어진다. 나중에 감옥에 나와서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 그는 지금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 꼽힌다. 한번은 라디오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저는 전에도 야망이 있었고, 지금도 야망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나 척 콜슨을 위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한 야망이 있습니다.”

인생은 경주다. 바울은 죽음을 앞둔 인생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은 나의 코스를 마쳤다는 뜻이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 평생 푯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달려갔다. 그는 주변 것들에 의해 마음 빼앗기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 그 소명을 향해 끝까지 인생을 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몇가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 나는 예수 안에서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

● 이 비전은 이 땅의 비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인가?

● 그리고 나는 이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2009. 9. 13.

빌3:1-11 기쁨 도둑














지난 3일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 10점이 도난당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경찰은 사업가 리처드 와이즈먼의 LA 자택에 가로 세로 1m 크기에 무하마드 알리, OJ 심슨, 축구선수 펠레 등 스포츠스타들을 그린 그림 10점을 감쪽같이 도난당했는데, 경찰은 현상금만 100만 달러를 내걸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월에는 최진실씨의 유골함이 도난당했었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땅에서 쌓아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는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빌립보서 3장에는 또 다른 도둑을 얘기한다. 바로 기쁨 도둑이다.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도둑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기쁨과 행복, 감사를 도둑맞는다. 이 도둑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는 평화가 깨지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어진다.

기쁨
말씀드렸듯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본문 1절도 이렇게 시작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성경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얘기한다. 환경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데도 샘물처럼 솟구쳐나오는 기쁨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종종 영광이란 말은 천국과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기쁨을 우리가 이땅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님 한분이 책을 하나 소개시켜 주셨는데,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란 책이었다. 루마니아의 목사님이신데,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곤 했다. 감옥안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고문을 당하곤 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감옥에 갇혀 아픔과 추위를 견뎌내야했고, 고문과 배고픔을 당해만 했다. 그러나 한 밤중에 나는 여러 차례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곤 했다. 내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은 환경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신앙생활하도록 돕는 분이시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기쁨이 있다.

율법주의
그런데 이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기쁨도둑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문말씀을 요약하자면 이 기쁨도둑은 한마디로 율법주의(legalism)이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율법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이 들어왔다. 바울은 강경한 말들로 이들을 표현한다. 개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악한 일꾼이요, 할례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이다.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들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면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있다 하는 것들이 우리의 “의”가 되고 “공로”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면 나는 율법주의자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야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단의 특징이 무엇이냐? 이단은 그리스도 + Something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것도 해야한다. 이것이 이단이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대인들이었므로,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되는 표식 중에 하나는 할례이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반드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정통 유대인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른 말로는 유대주의자라고도 한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이것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도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정통 유대인인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4-6절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먼저 자기는 태생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다는 점을 얘기한다.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이 말한바 8일만에 유대인의 표식이었던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정통 히브리인이었다. 이스라엘 초대왕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만이 정통 유대인이요, 다른 지파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면서 피가 섞여 순수 유대인의 피를 잃버렸다. 그래서 그는 베냐민 지파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바울은 ‘열심’ 때문에 자랑할 것이 많았다. 율법에 대해서는 웬만한 것은 다 지켜 흠이 없다고 얘기한다. 율법에 대해서 철저했던 바리새인 출신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전에 기독교회를 핍박하여, 어디 기독교인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이들을 잡아들이던 사람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었다.
바울도 한때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율법주의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기 자랑을 내세우고, 자기 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전통이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시에 반드시 사도신경을 낭송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은 반드시 까운을 입어야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사먹지 않는다. 어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참석을 매우 강조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복음성가는 절대 안부르고 찬송가만 부른다.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꼭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려야한다.
물론 이것들은 좋은 전통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pride가 되는 것이다.
나는 새벽기도도 하고, 나는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나는 전도도 잘하고, 나는 주일날이면 장사도 안하고, 나는 술담배를 안하고, 나는 세금을 꼬박꼬박내고, 나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한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신앙적인 자랑거리가 된다. 율법주의는 뭐냐하면 이런 것들을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내 안에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가 없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도망가버린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기쁨도둑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어떤 교회 다녔다, 어떤 봉사를 했다, 어떤 목사님 밑에 있었다, 어떤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다, 제자훈련을 받았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자랑이 될수도 있다.
나는 신앙적으로 무슨 체험을 했다, 방언을 받았다, 예언의 능력을 받았다, 기도의 불을 받았다...이런 신앙체험이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내는데, 문제는 이것이 자기 자랑거리,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2-3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자기 열심을 내세운다, 바울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이다. 또 그는 에베소서 2:8-9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의 ‘열심’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다. 내가 기도많이 하고 교회봉사 많이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물이라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만일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천국은 순전히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있을 것이다.
나는 주일예배에 한번도 졸지않고 예배드렸다, 나는 교회에서 찬양봉사했다, 나는 부엌에서 열심히 봉사했다...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신앙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사람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꼭 신앙적인 내용만은 아니다. 이런 신앙적인 율법주의 뿐 아니라, 사회적인 율법주의, 도덕적인 율법주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경력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자기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을 자기의 의로 내세운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은밀히 돕는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문화적 소양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인 감각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문학적인 깊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회적, 도덕적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것들로 얼마든지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숙 주인겸 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밤에 일어나 침대에 자고 있는 사람들을 묶고는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짧으면 침대의 길이만큼 늘여서 죽인다.
우리가 대단히 여기는 그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돌변할 수 있다. 내 열심히 기준이 되고, 내 경력이 기준이 되고, 내 도덕성이 기준이 되고, 내 선행이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바울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이요,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자부심을 느꼈다.

변화
그러던 바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7-8절을 봅시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던 그것들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유익하게 생각되던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되고,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여기 배설물이란 표현은 매우 점잖은 표현이다. 사실 이말은 똥이란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대단히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 문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가 안되서 답답해 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교회 좀 열심 내는 것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변화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이 변화일까? 신앙생활을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무엇이 변화일까?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예배자리에 와있으면 이 사람이 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렇게 10년 20년 교회생활 한사람이면 완전히 변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교회에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적으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신앙인의 변화를 여러 각도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 예수 믿으면 분명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전에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바울이 경험했던 것들이다.
바울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 율법에 대한 자부심,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있었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똥처럼 여겨졌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신이 지금 중요하게 여겨는 것은 무엇인가? 안정적인 생활, 체면, 명성, 돈....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어느날 보니까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왔는데, 신앙을 갖고 보니까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더 중요한 꿈이 있더라. 이것이 변화이다.
여전히 교회 안에 있지만 세속적인 욕망이요, 세상적인 생각으로 앉아있다면,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좋아하고,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그대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에 그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똑같이 자랑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주장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했는데, 이제보니까 이게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제대로 신앙을 가진 것이다.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행위를 보면 나무랄데 없는데 율법주의자일 수 있다. 보다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야한다. 바울이 바로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 전에 유익하던 것이 해로운 것이라 깨달아지고, 오히려 똥처럼 여겨지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
그런데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다시 7-8절을 보자. 아까 7-8절을 읽을 때 중간 중간 몇 단어들을 생략했는데, 다시 읽어보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말한다. 예수를 만나니까 다른 모든 것이 똥처럼 여겨지더라. 내가 정통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프라이드도, 하나님께 대한 내 열심도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다 똥처럼 여겨지더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보면 경제용어가 숨어있다. 여기 <잃어버리고>라는 말과 <얻고>라는 말이다. 일년장사를 하고나서 손해와 수익을 따져본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믿고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장사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말하면 망하는 장사를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은 더 값나가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예수다. 예수를 얻었다.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는 나를 얻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아깝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면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똥이었다고 생각되어지면 똥을 잃어버렸는데 뭐가 아깝겠는가?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이 똥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다. 가장 값비싼 것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다. 여기 <안다>는 말은 <야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고 말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체험이다. 예수를 맛보고 예수를 느끼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의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의 능력을 맛보니까 다른 그 어떤 것도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 고백을 하는 것이다.
기쁨 도둑은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자기 자랑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난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랑거리가 똥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 하신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가 있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NBC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다. 기도하던 책상에는 조그마한 쪽지가 하나있었는데,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그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전세계의 전도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는 특별 찬양을 했다. 찬양이 끝나자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오랫동안 숙연케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2009. 9. 9.

빌2:19-30 우정의 기쁨














故 함 석헌 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예’보다도/‘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인생을 사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많다. 그런데 C. S. 루이스는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우정의 기쁨을 꼽았다.

불가에 둘러앉은 믿음의 친구들만큼 이 세상에 큰 기쁨이 있겠는가? 루이스(c. S. Lewis)

요즈음 사람들은 우정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고대사회에서 우정은 가장 행복한 것이었으며, 모든 종류의 사랑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왕관이었고, 모든 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우정을 무시한다. 우정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갔다. 잔칫상의 메인코스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정을 별로 경험해 보지 않으니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교회생활의 중심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의 우정의 관계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저녁 선선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의 동산에 오셔서 산책을 하셨다. 아마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우정을 나누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 성경에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지칭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단지 하나님과만 우정관계에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도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결혼관계를 포함해서 인간 사이에 우정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계획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우정 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 이 우정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우정의 바라면서도 우정 속에서 상처받는 긴장 속에 살게 되었다. 마치 인간은 고슴도치의 슬픈 사랑을 닳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는 추워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서로의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면 서로를 찔러댄다. 그래서 떨어지면 추운 겨울날의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 누군가 함께 있어줄 이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가까이 가면서 서로의 가슴에 찔리는 상처를 경험하곤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장벽,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엡2;14)을 허무셨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허무셨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을 허무셨다. 우정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우정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결혼만이 고독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정은 또 하나의 해결책이다. 우리 사회는 이성관계, 성적인 관계에 너무나 많은 초점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중요한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면에서 우정은 결혼보다 더 중요하다. 결혼관계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만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우정은 천국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를 좀 더 깊이알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 2:19-30에서 바울의 우정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 디도의 우정관계를 보여준다. 늘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된다. 바울에게는 깊은 우정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4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진실한 사랑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더베 혹은 루스드라출신의 사람으로 바울을 통해서 회심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게였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로이스로 되어있고,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 불렀고, 매우 긴밀한 우정관계를 가졌다.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여행에도 동참했고,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경우도 많았다.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들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종종 디모데를 보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말한다. 바울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자기 일을 구한다고 했다. 뉴욕 전화회사에서 500명의 사람들의 통화내용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500건의 통화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나”(I)라는 단어였다. 3,990회 사용되었다. Gladstone이라는 사람은 “이기심은 인류의 최대저주”라고 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의 일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또 한사람 에바브라디도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병든 것을 진실로 걱정하며, 근심했다고 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낸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해서는 병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바울에게도,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때때로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은 몇 가지 작은 일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다시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 걱정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걱정한다. 26절을 보니까,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우정관계의 첫 번째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친구들이 없다. 자기 필요를 위해서 친구를 사귀려는 사람들은 진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우정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확실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남의 친구가 되는 데 있다 ”고 했다.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2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2달 안에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라.”

그러나 이 말의 원조는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이 황금률이라 부르는 마태복음 7;12을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우정관계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이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전도는 대부분 이런 우정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2. 공통의 관심사.

바울이 이들과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 때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21절, 새번역)라고 말했다.

보통의 우정관계에서는 서로의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우정이 만들어진다. 연인사이의 애정과 친구사이의 우정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이성간의 애정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친구간의 우정은 함께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골프든 우표수집이든 음악이든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때 우정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우정은 좀 더 다른 차원이 있다. 단지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함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바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기독교의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없이는 우리의 우정이라는 것도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 없는 가정, 그리스도 없는 우정은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종 새롭게 예수 믿는 분들이 말한다. ‘내가 예수 믿은 후에 내가 전에 몇 십 년 알았던 사람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친구들은 그냥 서로 눈만 마주보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고, 무엇보다도 한 방향을 비라 보고 있는 사람들 이다. 그들은 동일한 목표, 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동일한 주인을 섬기고 있다. -c.s.루이스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밀함을 가리킬 때, ‘형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 부른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디모데를 가리켜서도 형제라고 부른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호칭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어떻게 불러주는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는 사실 우리 문화권의 배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를 형제로 불러주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저를 형제라 부르고, 저도 여러분을 형제라 불러주고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문화는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어떤 호칭이 그냥 호칭이 아니라 어떤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호칭은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저는 십대부터 제 모교회의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 주변에는 교제하는 다른 목사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 남서울 교회 홍정길 목사님,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등과 자주 만나시면서 우정을 나누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 곁에 있으면서 제게 아주 신선했던 것들은 서로에 대한 호칭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내놓으라 하는 목사인데,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는 제 가까운 친구목사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들에게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는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냥 ‘집사님’ 아직 직분을 받지 못한 분은 ‘성도님’, 좀 상처받지 않을 분 같다 싶으면 ‘형제님’이라고 부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함께 구원을 체험했다. 함께 같은 하나님을 부른다. 함께 같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 함께 동일한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함께 영원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같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된 이들이다.

3. 같은 비전.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이 친밀해질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2절에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한다. 바울과 함께 하는 동안에 디모데는 2인자의 자리를 기쁘게 감당했다. 바울은 제자라고 해서 디모데 위에 황제처럼 군림하지 않았다. 여기 22절에 [함께 수고했다]는 말은 [함께 종이 되었다]는 말이다. 25절에 에바브라디도에 대해서는 [함께 수고하고]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정이란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수고할 때, 그 가운데 우정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교우들과 친해지고 우정이 깊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왜 관심이 없는가 불평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수고하고 봉사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함께 교제하고 대화나누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우리의 교제가 내향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 끼리만의 교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가 목장교회에서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회봉사의 기회를 찾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밖을 내다보는 창문이 없는 집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가 빛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있어야 한다. 이 창문이 많을 수록 집은 빛이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만 살겠다고 창문을 줄이기 시작하면 집은 금방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제가 뉴질랜드에서 목회했을 때 제가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목사님이 오셔서 저희 교회에서 집회를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모임 후에 이런 저런 선배목회자로서 충고를 해주셨는데, 그 한 가지는 셀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셀 목회는 목회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목회자 중심의 강단 목회를 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충고는 교우들과 거리감을 두라는 것이었다. 교우들과 목욕탕 같은데 절대 같이가지말라고 충고하셨다. 저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충고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저는 셀 목회를 지향한다. 주일교회도 중요시 여기지만, 주중에 셀교회들, 목장교회들을 통해서 교회가 더 건강하게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교우들을 동역자라고 생각하면서 목회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목회를 우정의 길이라 생각한다. 교우들이 단지 목회의 대상자가 아니라, 교우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우정의 목회를 생각한다.

우정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같은 비전이 있어야 한다.

4. 어려운 일을 함께 감당함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자’(25절)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만일 여러분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기독교를 선택했다면 여러분은 잘못 선택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성경은 우리를 군사라고 부른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다.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이 바울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30절 말씀을 보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아프로디테라는 말에서 나왔다. 아프로디테는 로마의 비너스와 같은 신인데, 우리에게는 사랑의 신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도박의 신이기도 했다. 플루타크의 글에 보면 에바브로디도(에파프로디테)는 도박에서 최고액수를 걸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라는 말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했다는 말이, 원래는 자기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가는 도중에 그는 병에 걸렸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까지 갔던 것 같다. 그 와중에서도 에바브로디도는 꼬박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3배정도가 되는 1300KM, 꼬박 6주가 걸리는 험악한 길을 거쳐 로마에까지 갔던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우정을 담아 자기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에 도착해서 바울을 섬겼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우정이 이런 것이었다.

우정의 진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가짜 친구는 떠나가지만, 진짜 친구는 남는다. 예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했다.

우리는 인생 중에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 우정은 그런 어려움의 시기에 함께 있어주면서 서로를 격려해주고 서로를 붙들어줄 때 자라난다. 사람들이 잘될 때,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함께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우정은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너희는 나의 친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밤이 지나기 전에 제자들은 도망가고, 어떤 이는 배신하고, 어떤 이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정이다. 우정은 위험이 있다. 때로 거절당할 수 있다. 배신당할 수 있다.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상처의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것,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모험일지 모른다. 죄인된 이간끼리의 우정이니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상처받지 않을 안전한 길을 가기보다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정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길은 정확하게 이 길을 따른다. 교회에서 안전한 길은 다른 사람들과 깊이 섞이지 않는 길이다.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상처 안받는다. 이민생활하면서 사람들을 안 만나면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상처받을 위험이 있으면서도 모험하셨다. 우정의 길을 가셨다. 공동체의 길을 가셨다. 신앙의 길은 교회 공동체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재력과 미모가 있었던 포오샤라는 여인에게 많은 청혼자가 몰려든다.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서 3개의 상자를 준비한다. 황금상자, 은으로 된 상자, 납으로 된 상자. 청혼자가 포오샤의 초상화가 담겨있는 상자를 고르면 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

황금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얻게 되리라'라는 문구가 있었다.

은으로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있었다.

납으로 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작품 속에 모로코의 왕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황금상자를 고른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반짝이는 것이 곧 황금은 아니니. 내 바깥 모습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 그 혼을 팔았도다.” 황금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바를 얻는다고 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황금상자처럼 바깥모습만 보고 인생의 결정을 한다는 교훈이며, 거기서 얻는 것은 텅 빈 상자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황금상자 안에 초상화는 없었다.

또 다른 날에 아라곤의 왕자가 와서 청혼하게 되는데, 그는 은상자를 고른다. 이 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자기가 이 여인을 얻을 만한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상자를 여니까 바보가 눈을 껌뻑이는 그림이 있고,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바보들의 머리는 나를 선택하지만 나는 저주가 될 뿐이니, 이내 나는 사라지리라”. 거기에도 포오샤의 초상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밧사니오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모험이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있었다.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은 자, 행운은 따르고 선택도 옳으니! 이 행운이 그대에게 찾아온 이상, 이에 만족하고 새것을 찾지 말라. 이것으로 기쁨을 느끼고 이 행운을 지상의 행복으로 느끼면 그대 아가씨 곁으로 가서 입을 맞추고 청혼을 할지어다.” 거기에 초상화가 있었다.

우정의 길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 모험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다.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은 상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우정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우정에 실망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사랑에 실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앞에 상처와 실망을 드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의 우정에 결코 실망을 주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않고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2009. 8. 31.

빌2:12-18 불평을 넘어선 신앙











독일의 유명한 작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속에는 후랑케 부인이란 독실한 천주교도가 등장한다. 60세의 이 여자는주교의 반지에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내에선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처럼 웃지않는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꼭 두가지 경우에는 그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바로 돈을 셀때와 3백개의 유리병에 가득 채워놓은 과일 잼들을 셀 때이다. 그 여자의 유일한 기쁨은 매일 아침 지하실로 내려와 믈어가는 과일잼의 병들을 세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과일잼 병을 세고 돌아온 뒤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3백개의 과일잼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301개의 과일잼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웃지 않는 여자, 돈과 과일잼만이 기쁨이 되었던 여자, 그러나 그 기쁨마자도, 오늘은 300개 이오니, 내일은 301개로 허락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여인,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 여인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현재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참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평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2:1-11절까지의 내용이다. 여기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한 이유를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교인들간에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서야할 이유가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한다. 예수는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자리까지 겸손하셨다는 말씀을 나누고, 우리도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고, 교회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마땅히 예수님 처럼 교인들간에 서로간에 겸손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2:1-11의 내용이다.

이 예수님의 겸손을 얘기하고 나서 겸손의 한가지 실천으로 교인들간에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하고 있다.

v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과 시비를 다른 말로 불평이라 할 수 있다.

불평은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주범이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마음 속에 불평이들어오면 우리의 기쁨도 즐거움도 사라지게 된다.

불평은 신앙성장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주범도 사람들의 불평하는 태도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받을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엄청난 감격을 경험했다. 이제 그들 앞에 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원망해서 쓰겠어요? 그런데 뭐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뭐 또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뭐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여러 가지다. 난 특별히 원망하는 얘기 가운데 드라마틱한 얘기가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은.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원망했다. 원망도 여러 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은 이 원망의 죄, 다시 말하면 불평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원망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아직도 불평이요, 원망이요, 이래 원망 저래 원망인가? 아직 당신은 미숙한 거다. 유치한 거이다.

불평하는 사람들의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이들은 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성숙한 사람은 책임지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불평하는 것은 쉽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책임지는 것은 어렵다.

스캇 펙 박사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결혼생활에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교회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하고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자기는 여기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이다. 불평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1970년대 일본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나카 가쿠에이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짧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수상까지 올라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한때 뇌물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력과 부패 스캔들을 극복하고 정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그가 사람들을 대할 때의 당차면서도 자신을 먼저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다나카가 일본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일이다. 초등학교 출신인 그가 장관 자리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고 불평하였다. 게다가 대장성은 당시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대학을 비롯한 명문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많이 있는 집단이이서 그들의 자존심은 대단하였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다나카가 어떻게 최고 대학을 나온 우리들을 지휘할 수 있겠어?"

자신들이야말로 일본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장성 사람들은 그래서 공공연히 다나카가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된 것을 조롱했다.

다나카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불평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직원들의 술렁임 속에 당당히 취임연설을 강행했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듯이 여러분은 일본의 수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정도에 불과한 데다 대장성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러니 대장성 일은 여러분이 열심히 해 주십시오. 저는 뒤에서 여러분의 일에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다나카의 연설이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즘은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

아담과 하와부터 사람들은 책임지기를 싫어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그 과일을 따 먹었느냐? 하자, 아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여자때문입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라고 했던 아담이 정작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저 뱀 때문에 그랳습니다.‘

불평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말로 책임을 지는 신앙이다.

어떤 책임을 말하는가?

1.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v12.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엡 2:8-9, 새번역)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과 가장 비슷한 말은 선물이라는 단어이다. 선물은 돈없이 받는 것이다. 내가 선물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선물을 주면 돈을 치룰 필요가 없다. 선물은 거저 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구원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교회생활 열심히 해도 우리의 열심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그 이후에 계속되는 결혼생활에 대해서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을 회개했으면 이제 그리스도인 답게 책임있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가지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성경은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러 말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비판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무의도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는 삶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나의 트릭을 쓴다. 자기는 새신자라는 것이다. 믿음이 어려서 그런 책임을 질 능력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한지 10년 20년이 되도 여전히 새신자 의식으로 생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요 하는 것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 말은 구원받았지만, 이 구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축복과 성장과 변화와 능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 그저 부끄러운 구원상태에서 머무르게 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능력을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맛보기를 원하신다.

CS 루이스는 멋있는 휴양지에서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가 예수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체험한 그 구원의 감격을 진정 모르기 때문에 평생 진흙탕에서 지내가 세상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것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소원을 주신다. 때로는 성경을 읽고 싶은 소원, 기도하고 싶은 소원, 교회를 섬기고 싶은 소원...이런 소원들이 생길 때 이것을 무시하지 말라. 소멸하지 말라.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관심을 보여주고 싶은 소원이 생겼으면 전화를 걸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은 소원이 있으면 기도해주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구원의 깊은 경지에 까지 도달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의 소원을 주신다.

우리가 불평의 습관을 끊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멋있는 인격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술이 진흙탕을 뒹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멋있는 휴양지에 머무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겸손이 묻어나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서 책임지는 태도이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마땅히 예수 안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우리 행동에 책임을 지고, 우리 입술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불평을 그쳐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15절에 나와있는대로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기를 ” 원하신다. 세상사람들과는 구별되고, 세상 사람들과 남다르고 세상 사람들보다는 빛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남다르게 살 책임이 있다. 똑같이 욕하고, 똑같이 불평하고 똑같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보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오히려 자기 주장을 굽힐줄 알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할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 이것이 거룩이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 구별되게 살아야할 책임, 남들과 달라야할 책임이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뒤틀려있고, 꼬여있고,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고 거스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말을 곡해하고, 사람의 인격을 의심하고, 나쁜 상상을 하고,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성경은 이 세상은 사탄의 활동지라고 말한다. 사탄은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라 한다. 사탄은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들 마음 속에, 머리 속에 거짓을 심어준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순진한 환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교회는 도대체 어떻게 달라야할까? 하나님은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세상사람들에게 여기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겸손하게 살고, 섬기며 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낮추며 자신을 죽여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빛이 되고 있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 사이에 불편한 일이 생겼다. 이 둘은 모두 목축업자들이었는데, 양떼, 소떼가 많아지자 같은 목초지를 놓고 아브라함의 일꾼들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의 주목을 끄는 것은 창세기 13:7이다.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성경은 이 다툼의 현장에 이방 민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는 것들을 이방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툴 때, 교회가 서로 다툴 때, 누가 보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책임이 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다. 다르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이 어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라 하셨다. 소금은 소금의 맛이 있어야 하고, 설탕은 설탕의 맛이 있어야 하는데, 모양은 소금인데 전혀 소금기가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소금이 설탕맛이 나면 안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맛을 내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3.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세 번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한다.

v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립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어떤 태도로 가르쳤는가?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 말씀을 쉬운성경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삶을 믿음과 봉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사람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배운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

이들은 16절의 표현대로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것은 우리가 성경말씀을 배웠으면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배웠다하는 우리들이 맘대로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할까요?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이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었다는 것을 믿을까요? 이 말씀은 오늘도 진리고 오늘도 내게 생명이고, 오늘도 내게 길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서로 겸손하게 섬기라는 말씀을 배웠다면 이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권위를 드러낼 책임이 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한다.

여러분은 이 성경말씀을 믿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았는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는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죄사함받은 적이 있는가? 정녕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의 말씀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 성경말씀이 모든 원망과 시비를 그치라고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성경말씀 앞에 진지하게 서야한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인 것이다.

실제적인 제안

가. 불평하는 태도가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을 인정하라

나. 내가 져야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잠 19:3, 새번역)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

다.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 처한 상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하라.

마.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




2009. 8. 23.

빌2:1-11 공동체를 즐기는 법

2009. 8. 16.

빌1:12-27 신자들의 암호코드

행복과 기쁨

행복 happiniss / 일어난 일 happening에 기초함. 예. 로또당첨, 자녀의 대학진학, 승진...

일어난 일의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v12 '내가 당한 일이...‘

v13 '나의 매임이‘(I am in chains) / 사슬에 매여있음. 당시 관습

v17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할 줄로 생각하고..‘

20-23 살든지 죽든지...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v18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에게 일어난 일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예. 요한복음 4장.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 여인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챔. 28-29절.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며 다녔고,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음식을 구하러 갔었는데, 여인이 동네에 간 사이에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와서 ‘랍비여 잡수소서’ 라고 말하였다. 이때 예수님 말씀.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주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아니라 한 여인이 메시아를 만나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른 양식이었다.

어쩌면 바울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그 기쁨 코드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신 그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신자들의 암호코드’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공감이 갈 수 있는 기쁨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2절에 나와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개역한글성경에는 ‘복음의 진보’라고 되어있는데, 개정성경에는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고 표현되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사슬에 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이 상황에서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그의 기쁨의 암호코드, 그것은 한마디로 “복음”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만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복음이 뭐길래 바울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복음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는 것일까? 이것은 확실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암호코드이다.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코드이다. 이 복음의 가치, 이 복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기쁨코드를 가지고 산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좀 의아스러운 것은 우리도 복음을 아는데, 우리가 정말 바울의 그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오면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교회 밖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인데, 교회에 들어오니까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복음이란 뜻이 ‘기쁜 소식’이란 뜻도 배웠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했더니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라 배웠고, 우리는 복음은 안다고 자부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바울처럼 우리는 이 복음이 우리의 기쁨 코드가 되느냐하는 것을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손해보고 잃어버린다할지라도 이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못하는 뭔가 다른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말하는 이 복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더 심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못보는 다른 어떤 것을 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주권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12절에서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복음전도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에는 인류의 소망이 담겨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복음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자기가 쇠사슬에 매여있는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13절에 보니까 로마의 친위대와 기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말한다.

(빌 1:13,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가택연금상태로 있다가 어느 시점부터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있는 죄수가 되었는데, 쇠사슬에 매여있는 경우에 로마의 친위대원들과 4시간씩 함께 묶이게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네시간에 한번씩 새로운 로마친위대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로마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제들이 직접 뽑는 사람들로서, 12년간을 일하게 되며, 로마에서 가장 보수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12년간의 봉사를 마친후에 이들은 로마사회에서 엘리트로서 지도자들이 된다. 로마를 전도하기 위해서 이들만큼 전략적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네시간씩 이 친위대원들은 바울 옆에 매이게 되고, 이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다. 바울은 최소 2년간을 이렇게 매여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가 직접 복음을 개인적으로 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4,380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되었고, 그 결과 로마의 황실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네로황제가 자기 엄마와 아내, 자녀들을 죽이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복음을 위해서 내 삶을 사용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실패이고, 고난이고, 시련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이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은 우리 신자들의 기쁨의 암호코드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여기서 내 모든 것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인생의 우선순위

바울은 또한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인생이 혼란스러울 때 정말 보아야할 것은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것 말고도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17절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그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빈자리를 이용하여, 복음전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경쟁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괴롭다. 뭐든지 다 경쟁으로 생각한다. 제가 전에 있었던 지역에서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교제하는데, 한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우리는 다 경쟁관계가 아니냐? 사실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한인교회가 여럿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좋게만 비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한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 어느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다 보여줄 수 없다. 한 교회안에서도 여러 지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한 교회가 모든 지체노릇을 할 수 없다. 한 교회는 손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입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본 훼퍼 목사는 한 교회가 자신을 전능한 단체로 보기 시작할 때 공동체의 위기가 온다고 했다. 각 교회가 잘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기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다. 교회가 경쟁적인 모습으로 나가면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시대에도 그렇게 경쟁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그들의 경쟁심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18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What does it matter? The important thing is...."

이들의 경쟁심 잘못이다. 동기 잘못되었다. 태도 잘못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겠다. 만일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를 보았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다른 무엇보다더 소중한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12절에서는 단지 ‘복음전파의 진전’이란 말을 썼는데, 14절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것’으로, 18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분이었다. 20-21절을 쉬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빌 1:20-21, 쉬운) [20]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살고 죽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는 담대히 말한다. “내게 사는 목적은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돈이니....”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재미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생의 재미거리를 찾아다닌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권력, 지위, 인기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들이지만, 문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도 한 때 이런 것들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빌립보서 3:7-8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빌 3:7-8, 쉬운) [7]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8]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세상의 다른 것들이 오히려 쓰레기처럼 보이기 만드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연속적으로 비극이 일어나고, 고통이 발생하지만, 그는 기쁨의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만날 수록 더 큰 기쁨이 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비교하면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3.사람들의 소망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빌 1:25, 쉬운) 내가 여러분 곁에 머물러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또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고싶어하는 것은 단지 이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27-28을 봅시다.

(빌 1:27-28, 새번역)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27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알렐산더 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로마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빌립보는 옥타비안누스의 중요한 기지가 되고, 그 이유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는데,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로마 본토인과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인두세 등 여러 가지 세제혜택이 주어졌다. 이들은 로마인의 옷을 입었고, 로마의 관습을 지켰고, 로마인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이 공백을 돈으로 채워보고, 인기로 채워보고,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로마의 시민권이든, 호주 시민권이든 그런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은 오직 복음만이 채울 수 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인생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담대히 사람들이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복음의 암호코드이다.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복음은 사람들의 소망이다. 사람들은 이 복음안에서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소망을 발견한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지만, 그는 기뻐하고 기뻐했다. 그에게는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기뻐하며 살았다.

여러분에게 이런 복음의 암호코드가 있는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복음은 이런 복음인가?



2009. 8. 14.

빌1:6 그래도 우리는 확신합니다

2009. 8. 2.

눅19:28-40 we are donkeys

눅19:28-40 We are donkeys

우리들에게 소나 말에 비하면 당나귀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어릴 적 옛날 이야기나 이솝 우화에서 당나귀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당나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타고갔던 당나귀이다. 본문에 나오는 당나귀는 어른 당나귀가 아니라 새끼 당나귀, 영어로 colt라고 하는 당나귀이다.

성경은 이 어린 당나귀가 감람산 근처의 어느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당나귀는 감람산 너무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감람산 너머에 예루살렘이 있었다.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도시의 중심은 성전이었다. 이곳은 인류의 중심지였다.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영향력의 중심지였다. 이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메시아에 대해서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의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우고 역사, 문화, 종교, 영향력의 중심지로 나아갔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자리까지 나아갔다. 이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간 곳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 되었다. 세상 변화의 샘터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변화되는 현장이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어린 당나귀에게 얼마나 놀라운 날인가?

이 어린 당나귀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에 이렇게 쓰임받을 수 있었을까? 30절을 쉬운번역으로 읽어보자.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당나귀는 사람들이 타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나귀는 그동안 한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새끼였다. 예수님이 이 어린 당나귀를 타고 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어린 당나귀가 말해주는 바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그 도구로서 이런 어린 당나귀같은 것들을 사용하신다. 아직 너무 어려서 사람들을 태우기에 적당치 않다고 여겨지는 당나귀, 아직은 준비가 안되었다고 여겨지는 당나귀들을 사용하신다. 세상에서 닳고 닳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 경험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은 어리다고 여겨지고, 부족해 보이고, 아직은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 당나귀는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그런 방법으로도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 어린 당나귀처럼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쓰신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늘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쓰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교회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 다른 교회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가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 “다른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판박이처럼 똑같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타보지 못한 당나귀, 예상하지 못한 당나귀를 사용하셨듯이 교회를 늘 새롭게 사용하신다. 어떤 교회는 찬양사역을 통해서 쓰임받을 수 있고, 어떤 교회는 한글학교를 통해서 쓰임받을 수가 있고, 어떤 교회는 교우들을 잘 돌보는 것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나름대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비전과 사명이 다르고, 교회의 리더십 체제가 다르고, 목회의 초점이 다를 수 있다.

일반 기업들을 생각해보라. 삼성기업이 현대나 대우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기업들마다 자기들의 방식이 있고, 품목이 있고, 전략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모두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방법에 매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써오는 방법이 아니면 새로운 것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얼마든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들이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주시는 아이디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 앞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 어린 당나귀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타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사람들이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이 당나귀는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당나귀는 또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나귀는 그냥 마을 한쪽에 매여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구도 이 어린 당나귀를 눈여겨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새로운 어디를 찾아가려면 긴장한다. 네비게이션을 키고 일러준대로 왼쪽, 오른쪽, 직진... 골목 골목가다가 때대로 GPS가 인도한 곳이 엉뚱한 곳일 수도 있다. 이 당나귀는 그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 있지 않았다. 그냥 흔히 볼수 있는 그런데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 사람들이 특별하게 보지도 않고 눈여겨 보지도 않는 그런 것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그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것들, 이 상황들, 이 사람들, 이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재능도 사용하실 수 있고,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 마치 그 어린 당나귀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라. 이 당나귀는 예수님이 앉으신 이동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이 당나귀는 풀여야 했다.

묶여있던 당나귀는 풀려야했다. 묶여있는 당나귀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나귀를 풀어라”. “그리고 내게로 데려오라”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삶 속에 있다. 그저 풀기만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을 묶어놓은 것은 없는가? 누군가 교회를 잠자는 거인이라 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이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의 성도들 안에 있는데, 그 잠재력들이 잠자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귀를 풀라.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나귀를 풀지않으면 안된다. 여러분의 걱정 때문에 묶여있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묶여있고, 아직은 때가 안됐다.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고 묶여있지는 않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 어린 당나귀도 준비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타본 당나귀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리다고 생각하는 당나귀였다. 나귀를 풀줄 아는 세대가 되자.

주님께서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로 데려오라”

주님께서는 33-34절에 이렇게 말한다.

(눅 19:33-34, 공동) [33]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34]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세상에는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나귀들이 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한다.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을 쓰시고 싶어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이 사용하신다고 했을 때, 세상은 이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음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비즈니스가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저널리즘이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다. 정치도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면,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윌버 포스

혹시 “Amazing Grac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세기 영국의 하원 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그는 노예무역에 대항해서 강력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서너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운동에 함께 참여하며 서로에게 헌신했고 그 거대한 악을 바로잡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이들은 런던 외곽에 있는 클래펌 지역에서 모여 살아 나중에는 클래펌파 (Clapham Sect)로 알려졌다. 20년 동안 이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전쟁을 치르듯 싸웠다. 어떤 해에 의회가 투표를 통해서 이들의 제안을 폐기해 버리면 바로 다음 해에 또 제안했다. 득표수가 적어 다음번 투표 때까지 2년 동안 일을 진행시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노예제도는 대영제국에서 매우 이윤이 큰 사업이었다. 리버풀에서 출발하는 500척의 배가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로 또 거기에서 미대륙으로 다니면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장사를 했다. 노예무역상이 벌어들인 수천 파운드의 돈 중에서 상당 부분은 하원 의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만나서 3시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했으며, 영국 전역에 소책자와 안내지를 배포했다. 또 하원에서 몇날 며칠을 서서 정의를 외쳤다. 드디어 1807년, 20년 동안의 싸움 끝에 노예무역이 의회의 투표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1833년 윌버포스가 임종을 맞이할 무렵에는 노예제 자체가 대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되었다. 윌버 포스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하나님이 이것은 내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영역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정치도 하나님의 것이다. 골퍼로서 하나님님께 영광돌릴 수도 있고, 회사 경영자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고, 우리의 음악으로, 영화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정치인이 되라. 음악가가 되라. 영화PD가 되라. 이것들을 예수님이 사용하시고, 예수님이 타고가시는 어린 당나귀가 되게 하라. 사업을 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경제윤리를 생각하며 본이 되는 사업가가 되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귀에 태워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태우기만 한다면,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업, 정치가 예수님의 어린 당나귀가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어린 당나귀를 쓰시는데 미안해하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쓰게 돼서 미안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은 교만하거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날 그 당나귀를 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이시다. 그러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재능과 재주를 쓰신다면, 여러분의 삶을 사로잡으신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쓰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이 나귀에 타고 계신지만 확인하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은 절대 사과하지 않으셨다.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행진하시자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온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열정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기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하셨는지 아시는가? “저들이 나를 경배하지 않으면 돌들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 물러서거나 걱정하지 말라. 찬양과 경배에는 어떤 힘이 있다. 나귀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 누가 찬양을 인도하고, 누가 노래를 부르고 누가 악기를 연주하는가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찬송가를 부르느냐 복음송을 부르느냐, 악기를 사용하느냐 안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어린 나귀들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 임재하시고, 여기 함께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나귀에 대해서 너무 매혹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 열정있는 교회가 되자. 이점에 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세상에 대해서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자.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과해야한다고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기 때문이다. 나귀에 앉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나귀에 앉으신 주님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귀에 앉히셨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미안해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으셨다. 당시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었다. 이 성전을 나의 집이라 부르셨다.

(눅 19:45-46, 새번역) [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집은...’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내 집이라고 부르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심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당신의 성전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구약성경에서는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다. 지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예수님이 당나귀 위에 앉으신 것에 대해서 사과하실 것 같은 상황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강하고 담대해야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나귀에 앉으시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셨다. 그의 열정, 그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말이다.

(눅 20:1, 새번역)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실 때에....

물론 예수님이 복음이시다. 예수님은 복음과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셨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그분은 물러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기회가 있다. 주님께 영광돌리고 경배할 기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지으시겠다고 하신 것을 지을 기회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할 기회가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씨를 뿌리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에 두셨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가지시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사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강하게 서시라. 예수님 안에서 신자로서 강하게 살라. 오늘은 물러설 날이 있다. 오늘은 앞으로나아가는 날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사용하실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여러분의 당나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당나귀 위에 예수님이 타시면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상상도 못할 것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노력이나 무엇이든지 그것을 당나귀로 보라.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

예수님을 태우고 감람산을 내려오는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당나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일꾼이며 이동수단일 뿐이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찬양하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 앞에 깔았다. 나귀가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선하 아이디어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교회일 수 있고, 목장교회일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의 재능과 재주일 수 있다. 그러나 당나귀에 현혹되지는 말라. 절대로 그것이 주인공이라고 우쭐거리지 말고 혼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교회는 빌딩,프로그램, 조직, 설교, 사람들, 재정... 그러나 이것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나귀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나귀 위에 계실 때에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관련 설교들:::

설교주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