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3.

빌3:1-11 기쁨 도둑














지난 3일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 10점이 도난당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경찰은 사업가 리처드 와이즈먼의 LA 자택에 가로 세로 1m 크기에 무하마드 알리, OJ 심슨, 축구선수 펠레 등 스포츠스타들을 그린 그림 10점을 감쪽같이 도난당했는데, 경찰은 현상금만 100만 달러를 내걸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월에는 최진실씨의 유골함이 도난당했었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땅에서 쌓아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는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빌립보서 3장에는 또 다른 도둑을 얘기한다. 바로 기쁨 도둑이다.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도둑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기쁨과 행복, 감사를 도둑맞는다. 이 도둑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는 평화가 깨지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어진다.

기쁨
말씀드렸듯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본문 1절도 이렇게 시작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성경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얘기한다. 환경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데도 샘물처럼 솟구쳐나오는 기쁨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종종 영광이란 말은 천국과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기쁨을 우리가 이땅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님 한분이 책을 하나 소개시켜 주셨는데,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란 책이었다. 루마니아의 목사님이신데,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곤 했다. 감옥안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고문을 당하곤 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감옥에 갇혀 아픔과 추위를 견뎌내야했고, 고문과 배고픔을 당해만 했다. 그러나 한 밤중에 나는 여러 차례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곤 했다. 내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은 환경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신앙생활하도록 돕는 분이시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기쁨이 있다.

율법주의
그런데 이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기쁨도둑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문말씀을 요약하자면 이 기쁨도둑은 한마디로 율법주의(legalism)이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율법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이 들어왔다. 바울은 강경한 말들로 이들을 표현한다. 개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악한 일꾼이요, 할례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이다.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들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면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있다 하는 것들이 우리의 “의”가 되고 “공로”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면 나는 율법주의자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야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단의 특징이 무엇이냐? 이단은 그리스도 + Something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것도 해야한다. 이것이 이단이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대인들이었므로,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되는 표식 중에 하나는 할례이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반드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정통 유대인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른 말로는 유대주의자라고도 한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이것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도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정통 유대인인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4-6절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먼저 자기는 태생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다는 점을 얘기한다.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이 말한바 8일만에 유대인의 표식이었던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정통 히브리인이었다. 이스라엘 초대왕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만이 정통 유대인이요, 다른 지파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면서 피가 섞여 순수 유대인의 피를 잃버렸다. 그래서 그는 베냐민 지파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바울은 ‘열심’ 때문에 자랑할 것이 많았다. 율법에 대해서는 웬만한 것은 다 지켜 흠이 없다고 얘기한다. 율법에 대해서 철저했던 바리새인 출신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전에 기독교회를 핍박하여, 어디 기독교인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이들을 잡아들이던 사람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었다.
바울도 한때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율법주의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기 자랑을 내세우고, 자기 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전통이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시에 반드시 사도신경을 낭송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은 반드시 까운을 입어야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사먹지 않는다. 어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참석을 매우 강조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복음성가는 절대 안부르고 찬송가만 부른다.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꼭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려야한다.
물론 이것들은 좋은 전통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pride가 되는 것이다.
나는 새벽기도도 하고, 나는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나는 전도도 잘하고, 나는 주일날이면 장사도 안하고, 나는 술담배를 안하고, 나는 세금을 꼬박꼬박내고, 나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한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신앙적인 자랑거리가 된다. 율법주의는 뭐냐하면 이런 것들을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내 안에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가 없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도망가버린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기쁨도둑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어떤 교회 다녔다, 어떤 봉사를 했다, 어떤 목사님 밑에 있었다, 어떤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다, 제자훈련을 받았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자랑이 될수도 있다.
나는 신앙적으로 무슨 체험을 했다, 방언을 받았다, 예언의 능력을 받았다, 기도의 불을 받았다...이런 신앙체험이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내는데, 문제는 이것이 자기 자랑거리,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2-3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자기 열심을 내세운다, 바울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이다. 또 그는 에베소서 2:8-9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의 ‘열심’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다. 내가 기도많이 하고 교회봉사 많이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물이라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만일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천국은 순전히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있을 것이다.
나는 주일예배에 한번도 졸지않고 예배드렸다, 나는 교회에서 찬양봉사했다, 나는 부엌에서 열심히 봉사했다...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신앙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사람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꼭 신앙적인 내용만은 아니다. 이런 신앙적인 율법주의 뿐 아니라, 사회적인 율법주의, 도덕적인 율법주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경력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자기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을 자기의 의로 내세운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은밀히 돕는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문화적 소양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인 감각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문학적인 깊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회적, 도덕적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것들로 얼마든지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숙 주인겸 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밤에 일어나 침대에 자고 있는 사람들을 묶고는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짧으면 침대의 길이만큼 늘여서 죽인다.
우리가 대단히 여기는 그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돌변할 수 있다. 내 열심히 기준이 되고, 내 경력이 기준이 되고, 내 도덕성이 기준이 되고, 내 선행이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바울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이요,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자부심을 느꼈다.

변화
그러던 바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7-8절을 봅시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던 그것들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유익하게 생각되던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되고,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여기 배설물이란 표현은 매우 점잖은 표현이다. 사실 이말은 똥이란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대단히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 문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가 안되서 답답해 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교회 좀 열심 내는 것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변화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이 변화일까? 신앙생활을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무엇이 변화일까?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예배자리에 와있으면 이 사람이 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렇게 10년 20년 교회생활 한사람이면 완전히 변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교회에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적으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신앙인의 변화를 여러 각도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 예수 믿으면 분명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전에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바울이 경험했던 것들이다.
바울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 율법에 대한 자부심,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있었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똥처럼 여겨졌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신이 지금 중요하게 여겨는 것은 무엇인가? 안정적인 생활, 체면, 명성, 돈....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어느날 보니까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왔는데, 신앙을 갖고 보니까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더 중요한 꿈이 있더라. 이것이 변화이다.
여전히 교회 안에 있지만 세속적인 욕망이요, 세상적인 생각으로 앉아있다면,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좋아하고,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그대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에 그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똑같이 자랑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주장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했는데, 이제보니까 이게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제대로 신앙을 가진 것이다.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행위를 보면 나무랄데 없는데 율법주의자일 수 있다. 보다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야한다. 바울이 바로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 전에 유익하던 것이 해로운 것이라 깨달아지고, 오히려 똥처럼 여겨지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
그런데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다시 7-8절을 보자. 아까 7-8절을 읽을 때 중간 중간 몇 단어들을 생략했는데, 다시 읽어보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말한다. 예수를 만나니까 다른 모든 것이 똥처럼 여겨지더라. 내가 정통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프라이드도, 하나님께 대한 내 열심도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다 똥처럼 여겨지더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보면 경제용어가 숨어있다. 여기 <잃어버리고>라는 말과 <얻고>라는 말이다. 일년장사를 하고나서 손해와 수익을 따져본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믿고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장사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말하면 망하는 장사를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은 더 값나가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예수다. 예수를 얻었다.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는 나를 얻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아깝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면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똥이었다고 생각되어지면 똥을 잃어버렸는데 뭐가 아깝겠는가?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이 똥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다. 가장 값비싼 것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다. 여기 <안다>는 말은 <야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고 말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체험이다. 예수를 맛보고 예수를 느끼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의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의 능력을 맛보니까 다른 그 어떤 것도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 고백을 하는 것이다.
기쁨 도둑은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자기 자랑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난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랑거리가 똥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 하신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가 있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NBC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다. 기도하던 책상에는 조그마한 쪽지가 하나있었는데,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그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전세계의 전도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는 특별 찬양을 했다. 찬양이 끝나자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오랫동안 숙연케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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