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함 석헌 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예’보다도/‘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인생을 사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많다. 그런데 C. S. 루이스는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우정의 기쁨을 꼽았다.
불가에 둘러앉은 믿음의 친구들만큼 이 세상에 큰 기쁨이 있겠는가? 루이스(c. S. Lewis)
요즈음 사람들은 우정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고대사회에서 우정은 가장 행복한 것이었으며, 모든 종류의 사랑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왕관이었고, 모든 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우정을 무시한다. 우정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갔다. 잔칫상의 메인코스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정을 별로 경험해 보지 않으니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교회생활의 중심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의 우정의 관계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저녁 선선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의 동산에 오셔서 산책을 하셨다. 아마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우정을 나누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 성경에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지칭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단지 하나님과만 우정관계에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도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결혼관계를 포함해서 인간 사이에 우정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계획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우정 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 이 우정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우정의 바라면서도 우정 속에서 상처받는 긴장 속에 살게 되었다. 마치 인간은 고슴도치의 슬픈 사랑을 닳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는 추워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서로의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면 서로를 찔러댄다. 그래서 떨어지면 추운 겨울날의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 누군가 함께 있어줄 이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가까이 가면서 서로의 가슴에 찔리는 상처를 경험하곤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장벽,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엡2;14)을 허무셨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허무셨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을 허무셨다. 우정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우정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결혼만이 고독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정은 또 하나의 해결책이다. 우리 사회는 이성관계, 성적인 관계에 너무나 많은 초점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중요한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면에서 우정은 결혼보다 더 중요하다. 결혼관계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만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우정은 천국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를 좀 더 깊이알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 2:19-30에서 바울의 우정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 디도의 우정관계를 보여준다. 늘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된다. 바울에게는 깊은 우정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4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진실한 사랑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더베 혹은 루스드라출신의 사람으로 바울을 통해서 회심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게였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로이스로 되어있고,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 불렀고, 매우 긴밀한 우정관계를 가졌다.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여행에도 동참했고,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경우도 많았다.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들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종종 디모데를 보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말한다. 바울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자기 일을 구한다고 했다. 뉴욕 전화회사에서 500명의 사람들의 통화내용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500건의 통화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나”(I)라는 단어였다. 3,990회 사용되었다. Gladstone이라는 사람은 “이기심은 인류의 최대저주”라고 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의 일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또 한사람 에바브라디도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병든 것을 진실로 걱정하며, 근심했다고 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낸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해서는 병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바울에게도,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때때로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은 몇 가지 작은 일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다시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 걱정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걱정한다. 26절을 보니까,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우정관계의 첫 번째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친구들이 없다. 자기 필요를 위해서 친구를 사귀려는 사람들은 진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우정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확실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남의 친구가 되는 데 있다 ”고 했다.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2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2달 안에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라.”
그러나 이 말의 원조는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이 황금률이라 부르는 마태복음 7;12을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우정관계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이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전도는 대부분 이런 우정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2. 공통의 관심사.
바울이 이들과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 때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21절, 새번역)라고 말했다.
보통의 우정관계에서는 서로의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우정이 만들어진다. 연인사이의 애정과 친구사이의 우정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이성간의 애정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친구간의 우정은 함께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골프든 우표수집이든 음악이든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때 우정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우정은 좀 더 다른 차원이 있다. 단지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함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바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기독교의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없이는 우리의 우정이라는 것도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 없는 가정, 그리스도 없는 우정은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종 새롭게 예수 믿는 분들이 말한다. ‘내가 예수 믿은 후에 내가 전에 몇 십 년 알았던 사람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친구들은 그냥 서로 눈만 마주보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고, 무엇보다도 한 방향을 비라 보고 있는 사람들 이다. 그들은 동일한 목표, 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동일한 주인을 섬기고 있다. -c.s.루이스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밀함을 가리킬 때, ‘형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 부른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디모데를 가리켜서도 형제라고 부른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호칭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어떻게 불러주는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는 사실 우리 문화권의 배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를 형제로 불러주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저를 형제라 부르고, 저도 여러분을 형제라 불러주고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문화는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어떤 호칭이 그냥 호칭이 아니라 어떤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호칭은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저는 십대부터 제 모교회의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 주변에는 교제하는 다른 목사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 남서울 교회 홍정길 목사님,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등과 자주 만나시면서 우정을 나누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 곁에 있으면서 제게 아주 신선했던 것들은 서로에 대한 호칭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내놓으라 하는 목사인데,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는 제 가까운 친구목사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들에게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는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냥 ‘집사님’ 아직 직분을 받지 못한 분은 ‘성도님’, 좀 상처받지 않을 분 같다 싶으면 ‘형제님’이라고 부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함께 구원을 체험했다. 함께 같은 하나님을 부른다. 함께 같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 함께 동일한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함께 영원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같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된 이들이다.
3. 같은 비전.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이 친밀해질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2절에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한다. 바울과 함께 하는 동안에 디모데는 2인자의 자리를 기쁘게 감당했다. 바울은 제자라고 해서 디모데 위에 황제처럼 군림하지 않았다. 여기 22절에 [함께 수고했다]는 말은 [함께 종이 되었다]는 말이다. 25절에 에바브라디도에 대해서는 [함께 수고하고]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정이란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수고할 때, 그 가운데 우정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교우들과 친해지고 우정이 깊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왜 관심이 없는가 불평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수고하고 봉사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함께 교제하고 대화나누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우리의 교제가 내향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 끼리만의 교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가 목장교회에서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회봉사의 기회를 찾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밖을 내다보는 창문이 없는 집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가 빛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있어야 한다. 이 창문이 많을 수록 집은 빛이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만 살겠다고 창문을 줄이기 시작하면 집은 금방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제가 뉴질랜드에서 목회했을 때 제가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목사님이 오셔서 저희 교회에서 집회를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모임 후에 이런 저런 선배목회자로서 충고를 해주셨는데, 그 한 가지는 셀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셀 목회는 목회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목회자 중심의 강단 목회를 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충고는 교우들과 거리감을 두라는 것이었다. 교우들과 목욕탕 같은데 절대 같이가지말라고 충고하셨다. 저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충고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저는 셀 목회를 지향한다. 주일교회도 중요시 여기지만, 주중에 셀교회들, 목장교회들을 통해서 교회가 더 건강하게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교우들을 동역자라고 생각하면서 목회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목회를 우정의 길이라 생각한다. 교우들이 단지 목회의 대상자가 아니라, 교우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우정의 목회를 생각한다.
우정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같은 비전이 있어야 한다.
4. 어려운 일을 함께 감당함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자’(25절)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만일 여러분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기독교를 선택했다면 여러분은 잘못 선택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성경은 우리를 군사라고 부른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다.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이 바울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30절 말씀을 보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아프로디테라는 말에서 나왔다. 아프로디테는 로마의 비너스와 같은 신인데, 우리에게는 사랑의 신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도박의 신이기도 했다. 플루타크의 글에 보면 에바브로디도(에파프로디테)는 도박에서 최고액수를 걸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라는 말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했다는 말이, 원래는 자기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가는 도중에 그는 병에 걸렸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까지 갔던 것 같다. 그 와중에서도 에바브로디도는 꼬박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3배정도가 되는 1300KM, 꼬박 6주가 걸리는 험악한 길을 거쳐 로마에까지 갔던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우정을 담아 자기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에 도착해서 바울을 섬겼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우정이 이런 것이었다.
우정의 진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가짜 친구는 떠나가지만, 진짜 친구는 남는다. 예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했다.
우리는 인생 중에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 우정은 그런 어려움의 시기에 함께 있어주면서 서로를 격려해주고 서로를 붙들어줄 때 자라난다. 사람들이 잘될 때,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함께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우정은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너희는 나의 친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밤이 지나기 전에 제자들은 도망가고, 어떤 이는 배신하고, 어떤 이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정이다. 우정은 위험이 있다. 때로 거절당할 수 있다. 배신당할 수 있다.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상처의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것,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모험일지 모른다. 죄인된 이간끼리의 우정이니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상처받지 않을 안전한 길을 가기보다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정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길은 정확하게 이 길을 따른다. 교회에서 안전한 길은 다른 사람들과 깊이 섞이지 않는 길이다.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상처 안받는다. 이민생활하면서 사람들을 안 만나면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상처받을 위험이 있으면서도 모험하셨다. 우정의 길을 가셨다. 공동체의 길을 가셨다. 신앙의 길은 교회 공동체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재력과 미모가 있었던 포오샤라는 여인에게 많은 청혼자가 몰려든다.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서 3개의 상자를 준비한다. 황금상자, 은으로 된 상자, 납으로 된 상자. 청혼자가 포오샤의 초상화가 담겨있는 상자를 고르면 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
황금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얻게 되리라'라는 문구가 있었다.
은으로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있었다.
납으로 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작품 속에 모로코의 왕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황금상자를 고른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반짝이는 것이 곧 황금은 아니니. 내 바깥 모습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 그 혼을 팔았도다.” 황금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바를 얻는다고 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황금상자처럼 바깥모습만 보고 인생의 결정을 한다는 교훈이며, 거기서 얻는 것은 텅 빈 상자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황금상자 안에 초상화는 없었다.
또 다른 날에 아라곤의 왕자가 와서 청혼하게 되는데, 그는 은상자를 고른다. 이 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자기가 이 여인을 얻을 만한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상자를 여니까 바보가 눈을 껌뻑이는 그림이 있고,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바보들의 머리는 나를 선택하지만 나는 저주가 될 뿐이니, 이내 나는 사라지리라”. 거기에도 포오샤의 초상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밧사니오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모험이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있었다.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은 자, 행운은 따르고 선택도 옳으니! 이 행운이 그대에게 찾아온 이상, 이에 만족하고 새것을 찾지 말라. 이것으로 기쁨을 느끼고 이 행운을 지상의 행복으로 느끼면 그대 아가씨 곁으로 가서 입을 맞추고 청혼을 할지어다.” 거기에 초상화가 있었다.
우정의 길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 모험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다.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은 상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우정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우정에 실망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사랑에 실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앞에 상처와 실망을 드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의 우정에 결코 실망을 주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않고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