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기쁨
행복 happiniss / 일어난 일 happening에 기초함. 예. 로또당첨, 자녀의 대학진학, 승진...
일어난 일의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v12 '내가 당한 일이...‘
v13 '나의 매임이‘(I am in chains) / 사슬에 매여있음. 당시 관습
v17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할 줄로 생각하고..‘
20-23 살든지 죽든지...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v18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에게 일어난 일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예. 요한복음 4장.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 여인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챔. 28-29절.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며 다녔고,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음식을 구하러 갔었는데, 여인이 동네에 간 사이에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와서 ‘랍비여 잡수소서’ 라고 말하였다. 이때 예수님 말씀.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주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아니라 한 여인이 메시아를 만나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른 양식이었다.
어쩌면 바울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그 기쁨 코드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신 그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신자들의 암호코드’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공감이 갈 수 있는 기쁨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2절에 나와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개역한글성경에는 ‘복음의 진보’라고 되어있는데, 개정성경에는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고 표현되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사슬에 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이 상황에서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그의 기쁨의 암호코드, 그것은 한마디로 “복음”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만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복음이 뭐길래 바울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복음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는 것일까? 이것은 확실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암호코드이다.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코드이다. 이 복음의 가치, 이 복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기쁨코드를 가지고 산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좀 의아스러운 것은 우리도 복음을 아는데, 우리가 정말 바울의 그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오면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교회 밖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인데, 교회에 들어오니까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복음이란 뜻이 ‘기쁜 소식’이란 뜻도 배웠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했더니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라 배웠고, 우리는 복음은 안다고 자부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바울처럼 우리는 이 복음이 우리의 기쁨 코드가 되느냐하는 것을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손해보고 잃어버린다할지라도 이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못하는 뭔가 다른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말하는 이 복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더 심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못보는 다른 어떤 것을 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주권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12절에서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복음전도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에는 인류의 소망이 담겨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복음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자기가 쇠사슬에 매여있는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13절에 보니까 로마의 친위대와 기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말한다.
(빌 1:13,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가택연금상태로 있다가 어느 시점부터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있는 죄수가 되었는데, 쇠사슬에 매여있는 경우에 로마의 친위대원들과 4시간씩 함께 묶이게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네시간에 한번씩 새로운 로마친위대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로마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제들이 직접 뽑는 사람들로서, 12년간을 일하게 되며, 로마에서 가장 보수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12년간의 봉사를 마친후에 이들은 로마사회에서 엘리트로서 지도자들이 된다. 로마를 전도하기 위해서 이들만큼 전략적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네시간씩 이 친위대원들은 바울 옆에 매이게 되고, 이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다. 바울은 최소 2년간을 이렇게 매여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가 직접 복음을 개인적으로 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4,380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되었고, 그 결과 로마의 황실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네로황제가 자기 엄마와 아내, 자녀들을 죽이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복음을 위해서 내 삶을 사용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실패이고, 고난이고, 시련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이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은 우리 신자들의 기쁨의 암호코드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여기서 내 모든 것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인생의 우선순위
바울은 또한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인생이 혼란스러울 때 정말 보아야할 것은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것 말고도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17절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그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빈자리를 이용하여, 복음전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경쟁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괴롭다. 뭐든지 다 경쟁으로 생각한다. 제가 전에 있었던 지역에서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교제하는데, 한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우리는 다 경쟁관계가 아니냐? 사실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한인교회가 여럿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좋게만 비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한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 어느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다 보여줄 수 없다. 한 교회안에서도 여러 지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한 교회가 모든 지체노릇을 할 수 없다. 한 교회는 손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입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본 훼퍼 목사는 한 교회가 자신을 전능한 단체로 보기 시작할 때 공동체의 위기가 온다고 했다. 각 교회가 잘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기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다. 교회가 경쟁적인 모습으로 나가면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시대에도 그렇게 경쟁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그들의 경쟁심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18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What does it matter? The important thing is...."
이들의 경쟁심 잘못이다. 동기 잘못되었다. 태도 잘못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겠다. 만일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를 보았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다른 무엇보다더 소중한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12절에서는 단지 ‘복음전파의 진전’이란 말을 썼는데, 14절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것’으로, 18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분이었다. 20-21절을 쉬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빌 1:20-21, 쉬운) [20]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살고 죽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는 담대히 말한다. “내게 사는 목적은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돈이니....”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재미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생의 재미거리를 찾아다닌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권력, 지위, 인기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들이지만, 문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도 한 때 이런 것들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빌립보서 3:7-8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빌 3:7-8, 쉬운) [7]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8]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세상의 다른 것들이 오히려 쓰레기처럼 보이기 만드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연속적으로 비극이 일어나고, 고통이 발생하지만, 그는 기쁨의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만날 수록 더 큰 기쁨이 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비교하면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3.사람들의 소망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빌 1:25, 쉬운) 내가 여러분 곁에 머물러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또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고싶어하는 것은 단지 이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27-28을 봅시다.
(빌 1:27-28, 새번역)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27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알렐산더 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로마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빌립보는 옥타비안누스의 중요한 기지가 되고, 그 이유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는데,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로마 본토인과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인두세 등 여러 가지 세제혜택이 주어졌다. 이들은 로마인의 옷을 입었고, 로마의 관습을 지켰고, 로마인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이 공백을 돈으로 채워보고, 인기로 채워보고,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로마의 시민권이든, 호주 시민권이든 그런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은 오직 복음만이 채울 수 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인생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담대히 사람들이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복음의 암호코드이다.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복음은 사람들의 소망이다. 사람들은 이 복음안에서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소망을 발견한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지만, 그는 기뻐하고 기뻐했다. 그에게는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기뻐하며 살았다.
여러분에게 이런 복음의 암호코드가 있는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복음은 이런 복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