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5.

빌 4:10-20 우리는 거꾸로 삽니다.


기독교에는 많은 역설적 진리를 가르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대접하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으리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리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 ‘우리가 약할 때가 오히려 강할 때이다’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도 일종의 역설적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얻는 데서 찾고 소유하는데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정반대의 길에서 기쁨을 찾았다. 바로 나누어주고, 드리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진정한 기쁨은 나눔에 있고, 주는데 있고, 베푸는데 있다는 진리를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다(행20:35).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기쁨의 길이다. 이것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요, 우리의 걸어야할 길이다.

그렇다면 나눔은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가?

1. 나눔은 참여의 기쁨을 준다.

바울이 개척하고 섬겼던 교회가 꽤 많았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교회는 바로 빌립보 교회였다. 14-16절을 보자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은 선교사였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이 일은 성도들의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지만, 물질적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때때로 텐트만드는 일로 물질적인 필요를 충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물질을 함께 나누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길은 많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기도이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한가지 길은 기도이다. 우리가 매주일 예배 전에 기도정병단 모임을 시작했다. 여러분 여기에 많이 참여하시라. 우리가 교회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교회에서 직접 봉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부엌봉사에 참여하고 안내 봉사에 참여하고 기도순서에 참여하고 영상 음향봉사에 참여하고 찬양봉사에 참여하고....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물질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여러 가지 제목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기회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받고, 너희가 내 일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봉사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물질을 주 앞에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헌금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길은 아니다. 내 주변에 어려운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실 것이다. 이들을 양과 염소라고 표현하셨다. 양의 무리가 있고 염소의 무리가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가르셨는가? 먼저 양의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사람들은 의아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 염소의 무리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똑같은 기준으로 말씀하셨다.

마25:41-43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모질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25:45-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베푸는 것이며, 예수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은 바울의 일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하나님을 동참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여러분이 호주 수상이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여러분을 참여시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것은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나라의 국사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당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하고, 물질적으로 드리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2.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준다

빌립보 교인들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할 때에 헌금문제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를 언급한 적이 있다.

고후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기서 말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는 그리이스의 마게도냐 주에 속해 있는 한 도시이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역을 위해서 열심히 헌금한 것은 이들이 풍족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들에게는 환난이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는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풍성한 연보(헌금)을 드렸고, 힘껏 드렸고, 힘에 지나도록 드렸다고 바울은 증언한다.

우리가 많이 목격하는 바지만, 돈이 많다고 기부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다. 아마도 이민생활하고 유학생활을 우리들의 빠듯한 경제사정보다도 더 가난한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환난이 있고 시련이 있고 가난 속에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다.

다시 빌립보서 4장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자기 생활에도 힘겨운 이들이 풍성하게 헌금하고 나누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하나있었다. 바로 19절 말씀이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다. 이 약속은 바로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물질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헌신적으로 드리면, 누가 우리 생활을 책임지는가? 하나님께서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는 이 약속을 믿는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일을 구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저희는 목회를 하면서 제 첫목회지에서 얼마되지 않았지만, 저희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재산이었던 전세금 등을 교회를 위해 드렸다. 그러나 이제까지 저희가 생활하면서 밥굶어본적 없고,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딱히 못해본 것도 없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라는 얘기가 아니니까 겁내지 마시라.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부자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풍성하게 주님께 드려보라. 이웃들에게 나눠보라. 그리고 지켜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시나 안하시나 지켜보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가 하나님께 드릴 때, 그리고 이웃들과 물질을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을 경험하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신다. 네 아들, 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네가 100세에 낳은 아들, 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저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저지하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 그리고 산 저쪽에 보면 어린 양 하나가 있는 것을 보게될텐데, 그 양을 잡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산 저쪽에서 양 한마리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이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나보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아끼고, 우리가 애착을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나볼 수 있는 하나님이다.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알게한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주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내 삶을 인도해주신느 삶을 경험하게 해준다.

3. 하나님께 사랑을 드리는 기쁨을 준다.

나눔은 돌려받는 기쁨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이 전부인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사랑을 주는 기쁨이다. 물질을 이웃에게 나눔으로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기쁨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나눔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바로 사랑 자체를 주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주는 기쁨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혹은 이웃들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우리의 물질을 나눌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축복하시고 채워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그냥 사랑을 주는 것이다. 물질을 드림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기쁨, 물질을 드려 내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기쁨, 물질을 선교사에게 보냄으로 그냥 복음 자체를 사랑하는 우리의 기쁨이 있다. 이것을 드림으로 받는 이들이 기뻐한다면 그게 우리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사들이 격려를 받고 힘을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8절을 읽어보자.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했던 것 같다. 이것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말한다. ‘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우리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 아니겠는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미소지으셨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아니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받지 못한다 해도 내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위해 살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니엘이란 사람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정복되어 많은 인재들이 잡혀갔는데, 거기에는 다니엘도 있었고, 믿음 좋은 그의 세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듯이, 이 세친구들도 왕의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강요를 받았는데, 이들은 신앙 때문에 이를 거부했고, 체포되어 왕 앞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석에서 왕은 이렇게 말한다.

단3:14-15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그러자 이들은 담대히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7).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그렇게 하니하실지라도...” 저는 결국 우리 신앙이 여기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시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듣고 싶은 고백아니겠는가?




2009. 10. 18.

빌4:6-9 샬롬의 길














빌4:6-9 샬롬의 길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샬롬이란 뜻은 평화란 뜻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호주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바에 비하여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지만, 그 나라의 역사는 꽤 길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이 약 BC 2500년경의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5000년쯤 되는 셈이다. 그 긴 역사에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했다. 모세의 영도하에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면서 부터 이들은 전쟁을 겪어야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과 전쟁을 일으켰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했다. 가까이는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족속들과 늘 싸워야했고, 주변의 강대국인 아람제국, 앗시리아제국, 바벨론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제국, 로마 제국 등의 침략을 차례대로 겪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전체 땅은 우리 나라 강원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작은 나라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단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평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 마다 ‘샬롬’이라고 인사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뜻이다.

한국도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 한국은 이제까지 약 900번 정도의 외침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사말도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인데, 안녕이란 말은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요, 히브리어로 바꾸자면 샬롬이란 말이다.

오늘 성경은 평화를 말한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평강이란 한자어는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다

9절에서도 평화란 말이 나온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 말하고, 9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쓰이는 이 평화란 말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깊은 뜻이 있다. 바울사도도 편지할 때마다, 인사말로 두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바로 은혜와 평화란 말이다. 그는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말이 은혜란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다. 우리는 우리가 업적이 많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편지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평화란 말도 은혜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왜 바울은 평화를 그렇게 중요시여겼을까?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평화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아니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평화를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샬롬의 길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인류가 범죄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졌다. 인간의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평화스러운 관계를 깨뜨려버렸다. 우리 모두는 다 범죄하였고, 우리의 죄로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죄가 있는 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하는 공의로운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거룩함도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니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은 인간 대신에 자기 아들을 심판하시기까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인간은 범죄했다. 평화는 깨졌다.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는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인 이리안자야에는 식인종이라고 알려진 사위 족속 부락을 전도한 선교사이다. 자신의 선교경험을 ‘화해의 아이’란 제목으로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선교하려는 사위부족은 워낙 싸움을 즐기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족속이라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배반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보다 가룟 유다를 더 받아들이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선교사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전통의식을 바라보다가 아주 멋진 영감을 하나 얻었다. 이들에게는 두 부족이 싸우다가 한 부족이 지면 진 부족의 추장이 자기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치름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선교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생각해 냈고 그 의식이 행해질 때 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평화의 아이를 주셨으니 이는 아이가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 평화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로마서 5:10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적군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화해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의미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하나님과 등돌리고 살던 모습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뜻이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에 대해서 말한다. 오늘 성경본문 7절이 바로 그 말씀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이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바이다. 이구절 앞에 6절을 보면 우리가 이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염려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은 늘 염려할 거리들이 많다. 요즘에는 숱한 보험이 있다. 보험의 종류만 해도 수백가지가 넘을 것이다. 건강에 대해서도 염려할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의 큰 염려거리가 아닐 수 없고, 젊은 형제 자매들은 특히 미래의 삶에 대해서 큰 불안과 염려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민사회는 더 불안하다. 수시로 변하는 이민정책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솔직히 너무나 많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 눈앞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울고싶은 상황인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는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기도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것이 막혀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기도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기도대신에 염려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까 염려가 우리 삶의 습관이 되었다.

Walter Cavert란 분이 염려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44%의 염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염려이다.

30%의 염려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12%의 염려는 건강에 대한 쓸데없는 염려이다.

10%의 염려는 아주 사소한 것들,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한 지나친 염려들이다.

오직 8%만이 염려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염려하는 경우라 했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얼굴 속에는 늘 근심이 있다. A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웃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 B를 가지고 염려하기 시작한다. B가 해결되면 이 사람이 행복해할 것 같은데 곧바로 C를 가지고 염려한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한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평화를 주신다. 괴로운 상황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주신다. 울고 싶은 환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 평화를 맛보셨습니까? 이 평화를 누리십니까?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이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중세기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봉쇄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아마 밤새 산에 오른 것 같아 문을 열어 주면서 묻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그가 바로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명한 명작인 신곡(Divine Comedy, La Divina Commedia)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신곡을 꼭 단테가 인간 사후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신곡에서 그가 여행한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의 체험은 바로 여기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삶 그 자체의 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마다의 길에서도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지옥인가요, 연옥인가요, 낙원인가요? 물론 저는 연옥이라는 사후 세계는 비성경적이라고 믿지만 오늘의 우리의 지금의 영적 상태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인 상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그가 인생의 전반전에 경험한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 평화를 찾아 헤맨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두 가지 상처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아홉 살 난 소년의 영혼의 창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지나간 소녀 베아트리체, 그녀는 9년 후 한번더 그의 곁을 스치면서 그의 가슴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지만 그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나가 그의 가슴에 이룰 수 없는 비련의 상처를 남깁니다. 단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그의 아름다운 고향 ‘꽃의 도시 피렌체’가 정쟁의 도시가 되면서 그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귀향의 꿈을 그리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 비평가는 이런 사랑의 상처와 고향의 상처가 단테로 하여금 영원한 순례자가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방랑자 단테는 마침내 그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해 그이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친 신곡의 드라마 그 영혼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된 다음해(1321년,56세 되던 해) 그는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인도한 주님의 품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발견하고 눈을 감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그의 영원한 사랑을 만난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모든 것 속에 있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안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순례자 단테는 정욕의 추구로도 도덕으로도 정치로도 찾지 못한 그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마침내 그리스도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어도 비극의 주인공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거룩한 희극’(Divine 'Comedy'-tragedy의 반대라는 의미로)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천국이 그의 영혼에 임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체험한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영혼의 평화가 있는가?

셋째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길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더 한걸움 나가서 이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이 평화를 곳곳에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대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이 가면 그곳이 더 평화스러워집니까? 아니면 더 시끄러워집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 구절은 두가지로 표현한다.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졌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예수 믿어 변화되었지만,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옛 성품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혈기 때문에, 우리의 질투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시기 때문에 내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이 고통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시험에 들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기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한계가 있다.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예수님과 함께 간다면, 평강의 하나님가ㅗ 함께 간다면 그곳은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면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으로만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면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길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다.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쉬운 공식을 주지 않는다. 내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 8-9절 말씀을 읽어보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화평케 하는 길은 내가 먼저 주님과 동행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든지.

평화의 기도/聖프란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2009. 10. 4.

빌4: 4-7 항상 기뻐하라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재미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교회당이 아니라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잔치자리에 자주 참여하셨다. 오늘 우리는 추석을 맞이해서 야외에서 예배를 드린다. 내가 믿기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의 잔치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물론 인생에는 괴로움도 있고 고단함도 있다. 슬픔도 있고 시련도 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태도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는 것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는 기쁨이어야 한다. 감사이어야 한다. 단지 인생을 억지로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항상 기뻐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마음에 슬픔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첫째로 주님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4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했다. 세상의 기쁨은 주변환경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환경을 뛰어넘게 만든다. 내 주변환경은 어둡고 힘든대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주체하지 못할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주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 기쁨을 주신다.
둘째로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5절 말씀에 사람들을 <관용하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혼자만 즐겁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내 기쁨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내가 짜증나면 사람들을 대할 때도 짜증난다. 그런데 내가 기쁘면 사람들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좀 실수해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다. 내가 기쁘면 남을 대할 때도 기쁘게 대할 수도 있다.
셋째로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이 다 잘풀리는 것은 아니다. 6절 말씀을 보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만큼 염려할 것이 많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염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염려, 대학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이민생활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노후생활에 대한 염려... 많은 염려가 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은 늘 마음이 우울할 수 밖에 없다.
Dr Walter Cavert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 40%의 염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40%의 염려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 12%의 염려는 건강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들이다.
● 10%의 염려는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이다.
● 8%의 염려만이 진짜 걱정해야할만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염려할 거리가 없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염려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교회일만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생활 모든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내가 대학 전공을 결정하는 것에도 관심을가지신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란 무엇인가? 쉬운 말로 하면 인간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평강이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응답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 이상을 가져온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강을 경험한다. 기쁨을 경험한다. 요한복음 16:24에서 말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이 기도의 약속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가 많은 세상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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