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는 많은 역설적 진리를 가르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대접하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으리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리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 ‘우리가 약할 때가 오히려 강할 때이다’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도 일종의 역설적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얻는 데서 찾고 소유하는데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정반대의 길에서 기쁨을 찾았다. 바로 나누어주고, 드리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진정한 기쁨은 나눔에 있고, 주는데 있고, 베푸는데 있다는 진리를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다(행20:35).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기쁨의 길이다. 이것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요, 우리의 걸어야할 길이다.
그렇다면 나눔은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가?
1. 나눔은 참여의 기쁨을 준다.
바울이 개척하고 섬겼던 교회가 꽤 많았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교회는 바로 빌립보 교회였다. 14-16절을 보자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은 선교사였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이 일은 성도들의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지만, 물질적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때때로 텐트만드는 일로 물질적인 필요를 충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물질을 함께 나누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길은 많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기도이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한가지 길은 기도이다. 우리가 매주일 예배 전에 기도정병단 모임을 시작했다. 여러분 여기에 많이 참여하시라. 우리가 교회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교회에서 직접 봉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부엌봉사에 참여하고 안내 봉사에 참여하고 기도순서에 참여하고 영상 음향봉사에 참여하고 찬양봉사에 참여하고....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물질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여러 가지 제목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기회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받고, 너희가 내 일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봉사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물질을 주 앞에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헌금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길은 아니다. 내 주변에 어려운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실 것이다. 이들을 양과 염소라고 표현하셨다. 양의 무리가 있고 염소의 무리가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가르셨는가? 먼저 양의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사람들은 의아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 염소의 무리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똑같은 기준으로 말씀하셨다.
마25:41-43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모질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25:45-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베푸는 것이며, 예수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은 바울의 일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하나님을 동참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여러분이 호주 수상이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여러분을 참여시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것은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나라의 국사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당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하고, 물질적으로 드리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2.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준다
빌립보 교인들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할 때에 헌금문제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를 언급한 적이 있다.
고후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기서 말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는 그리이스의 마게도냐 주에 속해 있는 한 도시이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역을 위해서 열심히 헌금한 것은 이들이 풍족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들에게는 환난이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는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풍성한 연보(헌금)을 드렸고, 힘껏 드렸고, 힘에 지나도록 드렸다고 바울은 증언한다.
우리가 많이 목격하는 바지만, 돈이 많다고 기부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다. 아마도 이민생활하고 유학생활을 우리들의 빠듯한 경제사정보다도 더 가난한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환난이 있고 시련이 있고 가난 속에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다.
다시 빌립보서 4장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자기 생활에도 힘겨운 이들이 풍성하게 헌금하고 나누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하나있었다. 바로 19절 말씀이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다. 이 약속은 바로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물질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헌신적으로 드리면, 누가 우리 생활을 책임지는가? 하나님께서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는 이 약속을 믿는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일을 구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저희는 목회를 하면서 제 첫목회지에서 얼마되지 않았지만, 저희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재산이었던 전세금 등을 교회를 위해 드렸다. 그러나 이제까지 저희가 생활하면서 밥굶어본적 없고,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딱히 못해본 것도 없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라는 얘기가 아니니까 겁내지 마시라.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부자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풍성하게 주님께 드려보라. 이웃들에게 나눠보라. 그리고 지켜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시나 안하시나 지켜보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가 하나님께 드릴 때, 그리고 이웃들과 물질을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을 경험하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신다. 네 아들, 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네가 100세에 낳은 아들, 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저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저지하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 그리고 산 저쪽에 보면 어린 양 하나가 있는 것을 보게될텐데, 그 양을 잡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산 저쪽에서 양 한마리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이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나보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아끼고, 우리가 애착을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삭을 데리고 갈 때 만나볼 수 있는 하나님이다. 나눔은 하나님께 돌봄받는 기쁨을 알게한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주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내 삶을 인도해주신느 삶을 경험하게 해준다.
3. 하나님께 사랑을 드리는 기쁨을 준다.
나눔은 돌려받는 기쁨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이 전부인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사랑을 주는 기쁨이다. 물질을 이웃에게 나눔으로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기쁨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나눔은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바로 사랑 자체를 주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주는 기쁨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혹은 이웃들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우리의 물질을 나눌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축복하시고 채워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그냥 사랑을 주는 것이다. 물질을 드림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기쁨, 물질을 드려 내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기쁨, 물질을 선교사에게 보냄으로 그냥 복음 자체를 사랑하는 우리의 기쁨이 있다. 이것을 드림으로 받는 이들이 기뻐한다면 그게 우리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사들이 격려를 받고 힘을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8절을 읽어보자.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했던 것 같다. 이것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말한다. ‘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우리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면 이것이 우리의 기쁨 아니겠는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미소지으셨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아니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받지 못한다 해도 내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위해 살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니엘이란 사람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정복되어 많은 인재들이 잡혀갔는데, 거기에는 다니엘도 있었고, 믿음 좋은 그의 세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듯이, 이 세친구들도 왕의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강요를 받았는데, 이들은 신앙 때문에 이를 거부했고, 체포되어 왕 앞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석에서 왕은 이렇게 말한다.
단3:14-15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그러자 이들은 담대히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7).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그렇게 하니하실지라도...” 저는 결국 우리 신앙이 여기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시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듣고 싶은 고백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