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8.

막15:42-47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다-09.6.28

폴 포츠 동영상

우리는 방금전 폴 포츠의 얘기를 동영상으로 보았다. 이 사람은 무명의 사람이었다. 휴대폰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날 대회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그 결정을 동전던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날의 결정이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오늘 설교제목은 <브리튼 갓 탤런트>(Briton got a talent)의 여자 심사위원의 멘트에서 따왔다. 그녀는 그날 폴 포츠를 가리켜 석탄을 하나 발견했다고 말하고, 곧 그 석탄은 다이아몬드로 바뀔 것 같다고 얘기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도 석탄 같은 모습으로 있다가 다이아몬드로 바뀐 한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리마대 요셉이다. 요셉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기에 당시에 사람을 구분지어 부를 때, 그의 출신지역을 같이 언급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 함은 아리마다 출신 요셉이란 뜻이다. 데오르나르도 다 빈치가 빈치 출신 레오나르도란 뜻 아닌가? 아리마대는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구약에서는 <라마>라고 불리는 사무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사건 때 갑자기 이름이 튀어나와 두각을 나타냈다. 사실 이 사람은 열두제자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 19장 38절에서 이 요셉을 가리켜 예수의 제자라고 말한다. 어느 시점인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시점까지는 이 사람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무명의 제자였다. 무명의 제자였다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공헌을 한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린 상황에서 갑자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이 사람도 함께 묵상하게 된다.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된 상황이었다.

석탄 같은 인생이 많다. 폴 포츠는 브리튼 갓 탤런트에 나오기 전에 평범한 휴대폰 판매원에 불과했다. 내세울만한 외모도 갖지 못했다. 말도 어눌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재정적으로는 오히려 빚만 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생에 빛나는 구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무명의 제자였다. 석탄 같은 인생이었다. 우리들도 그럴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저 한 사람, 내세울 것이 없는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석탄 같은 인생도 얼마든지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단지 세상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이라고 한다면 아리마대 요셉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성경 마가복음 15장 43을 보면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라고 말한다. 영어성경에서는 “유명한 공회원”이라고 표현한다. 공회원은 국회의원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정치인 중에서도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다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은 아니다. 지난 금요일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가난한 크레인 운전사의 아홉 아들 중에 7번째 아들로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세계 최고가수가 된 마이클 잭슨은 어떤 면에서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재정난으로 자기의 집을 팔아넘긴 후에도 그가 죽기 전에 렌트해서 살던 집은 한 달에 US달러로 10만 불짜리 집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이라 볼 수 있을까요? 그와 19개월 동안 결혼생활을 했던 리사 마리에 의하면 결혼생활 내내 화장하지 않은 모습으로는 절대 부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침실에서도 항상 화장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수십 번의 성형수술을 통해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 마이클 잭슨은 수술 부작용으로 코뼈가 내려 앉아 얼굴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고 병균을 막기 위해 산소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역시 죽을 때까지 누군가가 자장가를 불러주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성경은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이 단지 사회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이미 이름이 정평이 난 공회원이었다. 여기 학생들 중에 어떤 이들은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리마대 요셉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존경받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꿈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단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세상에서 유명해 지는 것, 내가 원하는 직업과 직장 을 갖는 것, 내가 갖고 싶은 집을 사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다이아몬드 같은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는 오늘 아리마대 요셉을 기억하는 이유가 단지 이 사람이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본문에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한다.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이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 그는 세상적으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오늘의 사건이 있기 전에도 이미 경건한 사람이었고, 이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이미 예수의 제자였다. 오늘의 이전의 모습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그가 경건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이 그의 인생을 빛나게 했던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의 경건한 성품이 우리가 그를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입장에서 그저 석탄 같은 인생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교인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인상도, 의미도 주지 못할 수 있다. 우리끼지 좋아서 모이고 만나고 예배드리는 것이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 예배가 어땠고 설교가 어땠고, 예배 후에 나오는 우리 식사가 어땠느냐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조차 아무런 인상을 남지기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몀목상의 기독교인들,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이 많다. 어디가나 교회 다닌다고 얘기하고, 예수의 제자라고 얘기하고, 교회 얘기하고 성경 얘기하는데,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이 사람을 기억할 만한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 아미마대 요셉은 오늘의 사건이 있기 전에도 충분히 경건한 사람이었고, 예수의 제자였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우리들도 충분히 경건하고, 충분히 기독교인이고, 교인일 수 있으면서도 그저 석탄 같은 인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인생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성경말씀을 보자. 43절 말씀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 요셉은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당돌한” 행동이라고 묘사한다. 당돌하다는 것은 담대하는 뜻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요청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용기이다.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디는 순간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다이아몬드가 된 것은 바로 이 신앙적인 용기였다. 사실 이때까지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기고 있었다. 요한복음 19:38을 보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예수를 매도하는 분위기였다.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겼다고 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많았지만, 유대 지식층과 종교인들 중에는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틈만나면 예수를 비판하고 제거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아는 아리마대 요셉은 그를 숨기고 있었다. 자기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사회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명의 마틴

교회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때인 중세기의 일이다. 바셀에 살던 마틴(Martin of Basel)이라는 믿음의 사람은 성경의 대진리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타락했던 당시의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를 못했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 거실의 벽돌 하나를 빼어 양피지(가죽 종이)에다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넣어 놓았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나는 주님의 보혈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바셀의 마틴이 써서 감추어 둔 이 글을 약 200년 후에 발견이 되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마틴 루터였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한 마틴 루터는 단호하게 말을 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리요 ?" 드디어 마틴 루터의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이 세상에 퍼졌고, 세상은 밝아지고 교회는 개혁을 일으켜 새롭게 회복되었으며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떤 쪽의 마틴처럼 살고 있는가?

두명의 마틴 중에서 마틴 루터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었을 때, 그는 교회사의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그의 종교개혁의 기치로, 존 칼빈, 쯔빙글리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한번 복음적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용기를 내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동안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겼으나 이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제자인 것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당돌히’ 혹은 ‘담대히’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는데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가 준비해둔 무덤에 예수를 안치시켰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할 것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영원히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더 이상 그 무덤에 계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빈무덤은 이제 기독교사에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되었다. 이 사람이 용기는 기독교사의 가장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우리는 부활절 때마다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했던 예수의 빈무덤을 기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사람이 이런 용기를 내자 다른 숨어있던 사람들도 용기를 내게 되었다. 요한복음 19:38의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에 이어 39절에서는 니고데모 얘기가 나온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그도 공회원이었고, 아마도 그도 예수를 믿는 이였고, 그도 사람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용기를 내자 그도 용기를 내었다. 숨었던 사람이 자기를 밝혔다.

요한복음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우리들에게도 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서 식사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혹시나 놀림감이 될까해서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못한다.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우호적이 아닐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문제점, 교회의 문제점들을 실랄하게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 그럴 때면 우리들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우리가 예수믿는다는 것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영국의 왕들과 위대한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는 로렌스 경의 기념비가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아주 두려워하며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았다 ! " 유명한 요한 빅커스토스(John L. Bickprstoth)가 죽은 후에 그의 잠겨진 책상의 서랍에서는 그의 성공의 비결인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발견되었다. “오, 주님,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 "

일본인 그리스도인으로 ‘스키하라 치우네’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예수를 믿게 된 그는 기도 중에 외국 대사가 되어 복음을 열방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1930년 그는 러시아 근처 리투아니아의 총 영사로 임명되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는 인생의 큰 반전을 맞게 된다. 그 아침 그의 집무실 뜰에는 폴란드에서 나치 게슈타포의 체포를 면하기 위해 도망치는 유대인들 2-3백 명이 모여 있었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던 그들은 모두 일본 비자를 발급 받기를 원했다. 일본 비자만 받으면 그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키하라가 총영사가 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의 인가가 있어야 했다. 그는 즉시 동경에 전문을 보내서 발급 허가를 요청했지만 세 번 씩이나 중앙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잠시 기도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성경을 읽는다. 그날 아침 펼쳐진 말씀은 사도행전 5:29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유대인들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다. 사무라이 출신의 그리스도인 스키하라는 그가 비겁하지 않고 주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한 다음 비자 발급을 시작했다. 그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몇 동료들은 중앙 정부 관리들이 출동해서 그들을 해직하고 끌어내기까지 약 28일간 무려 6,000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그와 그의 가족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후일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근교에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받셈을 건립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은인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초청받아 오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하여 후회가 없었느냐는 한 유대인 기자의 질문이 있었을 때 가족을 대신하여 스키하라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하셨고, 저의 아버지와 저희들은 기꺼이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들(유대인들)을 인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남은 날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2009. 6. 21.

막15:33-38 십자가에서 배우는 용서의 교훈-09.6.21

2009. 6. 14.

막15:20-22 억지로 진 십자가-09.6.14


v20.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가복음은 이 한 구절로 끝내지만, 마태, 누가, 요한복음을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까지의 행적은 14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라틴어로 표현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을 표현한 것이다.

비아 돌로로사

제1지점.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다

제2지점.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희롱하다

제3지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가다 처음 쓰러지다.

제4지점.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를 만나시다.

제5지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대신 지다.

제6지점. 베로니카 여인이 물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주시다.

제7지점. 예수님이 두 번째 쓰러지시다.

제8지점.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시다.

제9지점. 예수님이 세 번째 쓰러지시다.

제10지점. 예수님의 옷을 벗기시다.

제11지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다.

제12지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다.

제13지점. 예수의 시신을 내려놓여지다.

제14지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예수를 장사지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에서 자주 쓰러지시자, 로마 군인들은 지나가던 행인이었던 한 사람을 불러다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하신다. 이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 속해 있는 도시였고,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여기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시몬이란 이름이 유대식 이름인 것으로 보아, 시몬은 구레네(지금의 리비아) 지역에 이민생활을 하던 유대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시몬은 유월절에 맞춰 아프리카에서 고국 팔레스틴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

구레네 시몬이 그날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나가는 길”이었다. 지나가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메고가게 된 것이다. 성경은 “억지로” 같이 가게하였다고 기록한다.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니라, 로마 군인이 명령하니까 억지로 지게된 것이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심부름을 시킬 수가 있었다. 시몬의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다. 우리는 시몬의 얘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우리 인생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억지로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고 싶은 십자가는 아닌데, 아니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억지로 져야되는 십자가들이 있다는 얘기이다.

어떤 이는 평소에 건강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를 만나 가령 자동차 사고 등을 만나 크게 부상하여 그만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떤 이는 불치의 병으로 말미암아 혹 일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에 부모를 잃고 일생을 고아로 살수밖에 없다. 어떤 젊은 자매들은 젊어서 남편을 읽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고생하면서 살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늙어 기력은 쇠약하여졌는데 부양할 자녀가 없다. 어떤 이들은 남달리 고독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녀에게 특별한 어려움이 있어서 억지로 지고가는 짐을 느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데, 때로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억지로 가정이나 직장, 교회생활을 이끌고 가야할 때도 있다. 한 미국작가의 글을 읽었는데, 한국아이 하나를 입양해서 키웠는데, 나중에 이 아이가 극심한 자폐아인 것이 밝혀졌고 이것 때문에 이 부부가 심한 갈등과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는데, 결국 신앙의 힘으로 어떻게 극복해 내었는지 기록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짐들, 내가 억지로 짊어지게 된 십자가가 있을 수 있다.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는 예수의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다.

2. 종종 억지로 진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 커다란 축복을 가져오는 기회가 된다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된 시몬의 마음 속에 얼마나 커다란 불평이 있었겠는가? 그는 “재수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이 일이 시몬의 가정에 엄청난 축복을 가져오게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 기록한 대로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 하였다. 이렇게 쓴 것을 보니 당시 교회 안에서 알렉산더와 루포를 잘 알던 모양이다. 또한 로마서 16장 13절에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할 때에하였다. 이 구절로 미루어 보면 그의 아들 루포는 그 때에 로마에 살았으며 잘 믿을뿐더러 그 어머니는 바울을 잘 도운 여인이다. 시몬의 아들들과 아내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가장 보람있는 인생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목적을 두시고, 나를 통해서 무언가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손으로, 발로, 입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바로 시몬의 가족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가족이 되었다. 시몬은 뜻하지않게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지만, 이 일이 기초가 되어 그의 가족이 하나님을 잘믿는 가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게 되는 신앙의 명문가가 될 수 있었다.

시몬자체는 어땧는가?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예루살렘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복음이 비유대인들에게도 전파되는데, 그 최초의 장소가 안디옥이었다. 그런데 이때 비유대인 중에서 복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 바로 구레네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1:20에 보면 구레네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정착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13:1에 보시면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더불어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란 사람이 등장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므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시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에 구레네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몰려왔다는 점, 시므온이란 이름이 유대식으로는 시몬이라는 점, 니게르라는 것은 검다는 뜻으로, 아프리카에서 살다왔기 때문에 시몬의 피부색이 흑인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라고 말했는데 이때는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보내는 편지인데, 그 이전 어디선가 바울은 시몬의 가족을 만났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그곳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안디옥 교회의 시몬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그렇다면 시몬은 초대교회의 기독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지 모르지만,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건이 자신에게나 그의 가정에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가져왔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다.

요셉을 생각해 보라. 그는 행복 된 가정에 태어나 부모의 총애를 받으며 편안히 단락 한 가정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년시절에 형들의 시기를 받아 갑자기 큰 억지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종으로 팔려서 멀리 애굽으로 어린 몸이 끌려가게 되었다. 가정에서 온갖 사랑을 받던 소년은 갑자기 남의 집에 종이 되어 새벽부터 저녁까지 여러 가지로 고역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요셉도 물론 처음에는 마음에 큰 불평과 분노를 가졌을 줄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꾸준히 시위대 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수 년 후에는 주인의 심임을 얻어 그 가정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그 때에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젊은 요셉에게는 큰 정욕의 시험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 담대히 이겼다. 불행하게고 그 결과는 음란과 투기로 가득 찬 여인의 미움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만 감옥에까지 던짐을 받았다. 말하자면 두 번째 억지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참으며 죄수로서 가장 착한 죄수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아 주신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이다. 요셉도 역시 억지의 십자가를 두 번씩이나 졌으나 그는 믿음으로 굴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축복과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었다.

요셉뿐이 아니다. 우리는 동방의 의인 욥의 이야기를 안다. 그는 실로 다복한 분이었다. 재산도 많았고 자녀도 십 남매나 되었다. 그러나 가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큰 환난을 당하여 재산도 사라졌고 그 아름답던 자녀들까지 잃게 되었다. 보통 십자가가 아니라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고통의 십자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반항하지 아니하고 많은 번민(煩悶)과 고뇌(苦惱)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을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하여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고 그 심령이 하나님을 뵙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다른 방면의 축복도 갑절이나 받았다. 욥이 진 억지의 십자가도 결국은 감사와 영광의 십자가로 변하였다.

이처럼 억지로 진 십자가는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축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중국 대나무 가운데 심으면 4년 동안 자라지 않는 종이 있다. 작은 싹이 나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잡초를 제거하고, 물을 주고, 땅을 갈고, 자양분을 공급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5년째 되는 해에 이 별난 중국 대나무는 한꺼번에 24m까지 자란다. 그 전까지는 모든 성장이 땅 밑의 뿌리에서 일어난다. 일단 뿌리를 내리면, 모든 성장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냉소하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라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때를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억지로 감당하는 십자가는 언젠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을 믿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3. 때때로 억지로 진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가 된다.

시몬은 구레네 즉 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온 사람이다. 아마 유대인이 명절인 유월절이어서 온 성지순례객이었을 것이다. 멀리 살았기 때문에 팔레스탄 땅에 자주오지 못했을 것이고, 근간에 이스라엘 땅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방문시에 로마 병정들이 한 유대청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그저 불평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에 그분이 바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억지로 진 십자가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저 불평스럽고 짜증나는 재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였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감격해하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당시에는 그저 지겹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대하게 기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가 억지로 진 십자가는 사실은 그의 십자가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였는데, 그가 동참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 있다. 우리가 억지로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우리들은 우리 십자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가 남겨두신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장에서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을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했다

이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다시 십자가를 지시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 몸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고난받고,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간주해주신다. 때때로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억지로 감당해야할 눈물의 시간도 있다. 때로는 목장교회사람들과 적응하는 것이 너무나 힘겨울 수 있다. 때로는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시험이 들 때도 많이 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데, 그러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힘들고 괴로워도 억지로라도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한다. 그래야 우리가 성장하고 변한다.

때때로 우리가 진 억지로 감당해야하는 것들은 때로 지루하고, 평상적인 것들일 수 있다. 매일같이 누군가를 씻기고, 밥먹이고, 옷입히고 활동하는 것들을 도와주고 하는 등 평범한 하루 하루일 수 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항상 비장한 것들만 있는 것들은 아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하루 하루가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억지로 져야할 십자가일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작은 일상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날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일생일대에 가장 위대한 하루였다. 이처럼 무심코 우리가 감당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다보면 억지로 감당해야할 십자가가 많다. 그러나 믿으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기회요, 예수님께서 이것을 언젠가 반드시 기억해주시리라는 것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 군인들이 사랑하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부터 런던 거리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영국의 상, 하원 의원들과 귀족들이 새벽부터 길 양쪽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고 영국 여왕이 자리에 앉자 마침내 영국 군인들의 개선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행렬의 처음에는 육군이 앞장서고 뒤를 이어 해군과 공군이 따르며 해병대가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작은 부대가 입구에 들어서자 갑자기 영국 여왕을 비롯해 귀족들과 서민들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그 작은 부대를 향해 한없이 박수를 칩니다. 그 작은 부대는 상이(傷痍) 군인들로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팔과 다리를 잃어버리거나 눈 혹은 몸뚱이 한 부분을 잃어버린 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개선 행렬의 진정한 스타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끝나고 역사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에는 앞의 상이 군인들처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주인공일 것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 13



2009. 6. 12.

막15 16-20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예수-09.6.7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력하게 나타난다.
  • 끌고
  • 입히고
  • 씌우고
  • 벗기고
  • 끌고가고
  • 군병들은 예수를
  • 때리고
  • 침뱉고
  • 절하며 조롱하고...
우리가 예상하는 예수는 이런 예수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능력의 예수를 원한다.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능력을 보여주는 예수를 원한다. 성경에서 기적과 신유를 베푸시던 예수를 원한다.
  • 오병이어의 기적
  •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
  • 바다를 잠잠케 하는 기적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던 기적의 주...
우리는 그런 예수를 성경에서 보고, 그런 예수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군병들 앞에 아무 힘없이 서있던 무력한 예수를 만나게 된다.
  • 우리의 고난과 눈물에 침묵하시고
  • 우리의 오랜 기도에도 응답은 없어 보이고
  • 우리의 가정에 일어난 비극을 막아주지도 못하셨고
  • 내가 받은 상처도 막어주지 못한 예수
이런 예수를 만나며 우리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에게 문제를 찾아본다.
  •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예수의 양면성이 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오셨지만,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베푸셨던 능력의 주이지만, 또 한편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한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네가 인류의 구원자라고 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고...
사람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지로 도탄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전사 같은 예수를 원했다. 초라하게 나귀타고 오는 예수가 아니라 왕의 백마를 타고 원수들을 제압하는 예수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는 너무 초라했고, 너무 무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등을 돌렸다.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간 예수가 어떻게 구원자일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십자가를 받드는 무리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고 묘사했다. 아무 쓸데없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버린 예수....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예수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버려버린다. 신앙을 버린다. 교회를 떠나지 않지만, 더 이상 예수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 예수는 “연한 순” 같을 것이라 예언했다.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은 연약한 메시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지점이다. 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살아계신 분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무력하게 나타나는가? 왜 예수는 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분은 내가 고통당하는 이 현실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C.S. 루이스는 아내를 잃어버린 후에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책, “헤아려본 슬픔”이란 책에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이 사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다. 진짜 위험은 하나님에 대해 몹시 불쾌한 것들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결론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아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재는 이렇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만 시험받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시험받았던 내용이었다. 마귀는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네 능력을 보여봐라. “돌을 떡이 되게 해보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보고, 이 세상 천하왕국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봐라”고 유혹했다. 분명 그는 돌이 떡이 되게 할 수 있었고,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고,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것이 시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시험을 거부한다. 마치 아무 힘도 없는 자처럼, 돌이 떡이 되게하는 대신 배고픔을 참으셨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고,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는 무력함을 선택하셨다. 로마의 병정들 앞에서 무력하게 서있었던 예수,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 아무런 응답이 없는 예수, 그저 힘없는 자처럼 서 있는 예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지만, 이것은 예수가 선택한 길이다.
왜 능력의 예수가 이 연약함의 길을 선택하셨을까? 그분은 왜 로마 병정들에게 당하셔야만 했고, 왜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고, 왜 예수는 힘없는 모습으로 사셨던 것일까? 왜 예수는 우리들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문제에 속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는 것일까? 왜 예수는 무력한 것처럼, 연약한 것처럼,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침묵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계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가지 이유는 그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란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저 멀리서 인간이 구할 때 능력을 베풀어주는 예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들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힘없는 모습으로 떨어야 하는 우리들과 같은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셨다.
  • 우리의 고난
  • 우리의 눈물
  • 죄인된 인간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는 우리들...
  • 작은 것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우리들...
  • 죽고 싶을 정도로 고민스러운 우리들
예수는 그런 우리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계시를 원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연약함을 몸소 경험하지 않은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때때로 그분이 속시원한 대답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는 바로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끌어안고 우리와 함께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인류 역사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던 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히 소수의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위젤(E, Wiesel)은 그의 저서 "밤" 가운데서 자기가 본 생생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담아 놓았다. 그 비극적인 얘기의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치스 친위대는 두 사람의 파리한 유대인과 청년 한 사람을,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두 사람은 곧 죽었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과의 싸움은 반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있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도대체 그분은 어디 있는가?"라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청년이 아직 밧줄에 매달려서 고난 당하고 있을 때 내 뒤의 그 사나이가 또 부르짖는 것을 들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거지?" 그리고 나는 하나의 소리가 내 속에서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다니? 바로 그 분은 여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고통당할 때, 말없이 같은 고통으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눈물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죽고싶은 고민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받은 가슴에, 상처입은 치유자로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이분을 믿으라.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가 되기원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없는 인생을 구한다. 모든 것이 손쉽게 해결되기 원하신다. 사람들은 상처없는 세상을 구한다. 이때 사람들이 바라보는 예수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우리가 원하는 것마다 주시는 예수이다. 필요할 때마다 능력과 기적과 신유를 베푸는 예수이다. 답답한 우리의 현실에 속시원히 대답해주는 예수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의 3가지 시험을 얘기하면서 돌이 떡이 되게하는 대신에,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대신에, 천하만국의 영광을 누리는 대신에 힘없이 배고파하고, 쉽게 상처받고, 연약한 모습의 예수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도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일지 모르나 예수는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도자였다. 세상의 힘은 강력함이요, 숫자요, 거대함이요, 다수이다. 그러나 예수는 연약함으로, 무력함으로, 소수의 사람들로 시작해서, 겨자씨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연약한 리더십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리더십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십이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예수가 이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성장시키기 원하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한계에 부딛혀야 깨진다. 절망에 도달해야 인간의 교만을 부순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야 인간의 고정관념을 부순다.
진정한 리더십은 우리를 연약함에 이끌고 가는 리더십이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배운다. 중년기의 갱년기를 경험하면서 도리어 이 세상도, 가정도 진정한 희망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만이 소망의 낙원인 것을 믿게 된다. 우리의 자아가 깨질 때 우리는 성장한다. 세상에서 절망을 느낄 때, 비로소 인간은 천국에 소망을 두게 된다.
사람들은 좀처럼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C.S.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어리 세상을 향해 외치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 했다. 잠잠히 말하면 사람들이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메가폰을 들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그 메가폰이 우리의 고통이요, 힘든 상황이요, 우리의 눈물이요, 우리의 죽고싶은 고민거리이다. 이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우리를 성장시킨다. 하나님을 보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한다. 그래서 때때로 예수는 힘없는 자 처럼, 무력한 자처럼, 침묵하시는 자처럼 우리 곁에 게신다.
다음은 헨리 나우웬이 '긍휼'이란 책에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어떤 곳에 ‘바보들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한 복판 밀밭에는 수박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수박들을 괴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도 그 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정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미련한 사람들아 나를 보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밀밭으로 돌진하여 수박을 쪼개 먹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저 괴물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자가 우리까지 살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건초 갈퀴를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러나 또 한 여행자가 이 마을에 들어서 이런 마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그는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설득하고 가르쳐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 수박을 먹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넓은 뜻이 있다. 천국은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다. 로마서 14:17에서 천국은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 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사람들은 의와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고난과 고생과 슬픔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지옥같은 인생도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임하십니까?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가 천국을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하는 자가 천국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넘어져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존재,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천국은 그렇게 우리에게 임한다.
군병들에게 힘없이 당하고만 있는 예수, 우리는 이런 예수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무력함,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땅에서 천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원리로 천국을 세워나가십니다.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땅에 천국을 세워나갑니다. 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보다는 사람들이 진정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군전쟁의 병사들처럼 무력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기독교인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이 죽음으로서, 자기가 희생당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갑니다. 우리가 교민 사회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일까요? 우리 교회가 재정이 튼튼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교민 사회가운데 심는 것일까요?
아니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밀알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희생하고 섬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섬김받는 제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군병들 앞에서 무력한 예수님,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연약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동참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 우리가 깨어지고 부서줘 진정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성장시키는 인도자가 되시고, 그 연약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나라를 세워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분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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