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1.

빌2:12-18 불평을 넘어선 신앙











독일의 유명한 작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속에는 후랑케 부인이란 독실한 천주교도가 등장한다. 60세의 이 여자는주교의 반지에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내에선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처럼 웃지않는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꼭 두가지 경우에는 그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바로 돈을 셀때와 3백개의 유리병에 가득 채워놓은 과일 잼들을 셀 때이다. 그 여자의 유일한 기쁨은 매일 아침 지하실로 내려와 믈어가는 과일잼의 병들을 세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과일잼 병을 세고 돌아온 뒤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3백개의 과일잼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301개의 과일잼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웃지 않는 여자, 돈과 과일잼만이 기쁨이 되었던 여자, 그러나 그 기쁨마자도, 오늘은 300개 이오니, 내일은 301개로 허락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여인,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 여인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현재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참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평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2:1-11절까지의 내용이다. 여기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한 이유를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교인들간에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서야할 이유가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한다. 예수는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자리까지 겸손하셨다는 말씀을 나누고, 우리도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고, 교회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마땅히 예수님 처럼 교인들간에 서로간에 겸손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2:1-11의 내용이다.

이 예수님의 겸손을 얘기하고 나서 겸손의 한가지 실천으로 교인들간에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하고 있다.

v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과 시비를 다른 말로 불평이라 할 수 있다.

불평은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주범이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마음 속에 불평이들어오면 우리의 기쁨도 즐거움도 사라지게 된다.

불평은 신앙성장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주범도 사람들의 불평하는 태도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받을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엄청난 감격을 경험했다. 이제 그들 앞에 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원망해서 쓰겠어요? 그런데 뭐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뭐 또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뭐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여러 가지다. 난 특별히 원망하는 얘기 가운데 드라마틱한 얘기가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은.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원망했다. 원망도 여러 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은 이 원망의 죄, 다시 말하면 불평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원망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아직도 불평이요, 원망이요, 이래 원망 저래 원망인가? 아직 당신은 미숙한 거다. 유치한 거이다.

불평하는 사람들의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이들은 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성숙한 사람은 책임지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불평하는 것은 쉽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책임지는 것은 어렵다.

스캇 펙 박사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결혼생활에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교회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하고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자기는 여기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이다. 불평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1970년대 일본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나카 가쿠에이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짧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수상까지 올라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한때 뇌물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력과 부패 스캔들을 극복하고 정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그가 사람들을 대할 때의 당차면서도 자신을 먼저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다나카가 일본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일이다. 초등학교 출신인 그가 장관 자리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고 불평하였다. 게다가 대장성은 당시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대학을 비롯한 명문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많이 있는 집단이이서 그들의 자존심은 대단하였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다나카가 어떻게 최고 대학을 나온 우리들을 지휘할 수 있겠어?"

자신들이야말로 일본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장성 사람들은 그래서 공공연히 다나카가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된 것을 조롱했다.

다나카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불평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직원들의 술렁임 속에 당당히 취임연설을 강행했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듯이 여러분은 일본의 수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정도에 불과한 데다 대장성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러니 대장성 일은 여러분이 열심히 해 주십시오. 저는 뒤에서 여러분의 일에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다나카의 연설이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즘은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

아담과 하와부터 사람들은 책임지기를 싫어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그 과일을 따 먹었느냐? 하자, 아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여자때문입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라고 했던 아담이 정작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저 뱀 때문에 그랳습니다.‘

불평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말로 책임을 지는 신앙이다.

어떤 책임을 말하는가?

1.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v12.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엡 2:8-9, 새번역)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과 가장 비슷한 말은 선물이라는 단어이다. 선물은 돈없이 받는 것이다. 내가 선물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선물을 주면 돈을 치룰 필요가 없다. 선물은 거저 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구원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교회생활 열심히 해도 우리의 열심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그 이후에 계속되는 결혼생활에 대해서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을 회개했으면 이제 그리스도인 답게 책임있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가지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성경은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러 말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비판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무의도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는 삶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나의 트릭을 쓴다. 자기는 새신자라는 것이다. 믿음이 어려서 그런 책임을 질 능력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한지 10년 20년이 되도 여전히 새신자 의식으로 생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요 하는 것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 말은 구원받았지만, 이 구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축복과 성장과 변화와 능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 그저 부끄러운 구원상태에서 머무르게 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능력을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맛보기를 원하신다.

CS 루이스는 멋있는 휴양지에서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가 예수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체험한 그 구원의 감격을 진정 모르기 때문에 평생 진흙탕에서 지내가 세상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것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소원을 주신다. 때로는 성경을 읽고 싶은 소원, 기도하고 싶은 소원, 교회를 섬기고 싶은 소원...이런 소원들이 생길 때 이것을 무시하지 말라. 소멸하지 말라.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관심을 보여주고 싶은 소원이 생겼으면 전화를 걸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은 소원이 있으면 기도해주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구원의 깊은 경지에 까지 도달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의 소원을 주신다.

우리가 불평의 습관을 끊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멋있는 인격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술이 진흙탕을 뒹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멋있는 휴양지에 머무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겸손이 묻어나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서 책임지는 태도이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마땅히 예수 안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우리 행동에 책임을 지고, 우리 입술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불평을 그쳐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15절에 나와있는대로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기를 ” 원하신다. 세상사람들과는 구별되고, 세상 사람들과 남다르고 세상 사람들보다는 빛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남다르게 살 책임이 있다. 똑같이 욕하고, 똑같이 불평하고 똑같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보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오히려 자기 주장을 굽힐줄 알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할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 이것이 거룩이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 구별되게 살아야할 책임, 남들과 달라야할 책임이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뒤틀려있고, 꼬여있고,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고 거스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말을 곡해하고, 사람의 인격을 의심하고, 나쁜 상상을 하고,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성경은 이 세상은 사탄의 활동지라고 말한다. 사탄은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라 한다. 사탄은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들 마음 속에, 머리 속에 거짓을 심어준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순진한 환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교회는 도대체 어떻게 달라야할까? 하나님은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세상사람들에게 여기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겸손하게 살고, 섬기며 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낮추며 자신을 죽여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빛이 되고 있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 사이에 불편한 일이 생겼다. 이 둘은 모두 목축업자들이었는데, 양떼, 소떼가 많아지자 같은 목초지를 놓고 아브라함의 일꾼들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의 주목을 끄는 것은 창세기 13:7이다.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성경은 이 다툼의 현장에 이방 민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는 것들을 이방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툴 때, 교회가 서로 다툴 때, 누가 보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책임이 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다. 다르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이 어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라 하셨다. 소금은 소금의 맛이 있어야 하고, 설탕은 설탕의 맛이 있어야 하는데, 모양은 소금인데 전혀 소금기가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소금이 설탕맛이 나면 안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맛을 내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3.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세 번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한다.

v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립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어떤 태도로 가르쳤는가?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 말씀을 쉬운성경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삶을 믿음과 봉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사람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배운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

이들은 16절의 표현대로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것은 우리가 성경말씀을 배웠으면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배웠다하는 우리들이 맘대로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할까요?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이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었다는 것을 믿을까요? 이 말씀은 오늘도 진리고 오늘도 내게 생명이고, 오늘도 내게 길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서로 겸손하게 섬기라는 말씀을 배웠다면 이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권위를 드러낼 책임이 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한다.

여러분은 이 성경말씀을 믿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았는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는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죄사함받은 적이 있는가? 정녕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의 말씀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 성경말씀이 모든 원망과 시비를 그치라고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성경말씀 앞에 진지하게 서야한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인 것이다.

실제적인 제안

가. 불평하는 태도가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을 인정하라

나. 내가 져야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잠 19:3, 새번역)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

다.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 처한 상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하라.

마.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




2009. 8. 23.

빌2:1-11 공동체를 즐기는 법

2009. 8. 16.

빌1:12-27 신자들의 암호코드

행복과 기쁨

행복 happiniss / 일어난 일 happening에 기초함. 예. 로또당첨, 자녀의 대학진학, 승진...

일어난 일의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v12 '내가 당한 일이...‘

v13 '나의 매임이‘(I am in chains) / 사슬에 매여있음. 당시 관습

v17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할 줄로 생각하고..‘

20-23 살든지 죽든지...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v18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에게 일어난 일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예. 요한복음 4장.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 여인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챔. 28-29절.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며 다녔고,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음식을 구하러 갔었는데, 여인이 동네에 간 사이에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와서 ‘랍비여 잡수소서’ 라고 말하였다. 이때 예수님 말씀.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주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아니라 한 여인이 메시아를 만나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른 양식이었다.

어쩌면 바울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그 기쁨 코드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신 그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신자들의 암호코드’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공감이 갈 수 있는 기쁨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2절에 나와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개역한글성경에는 ‘복음의 진보’라고 되어있는데, 개정성경에는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고 표현되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사슬에 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이 상황에서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그의 기쁨의 암호코드, 그것은 한마디로 “복음”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만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복음이 뭐길래 바울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복음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는 것일까? 이것은 확실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암호코드이다.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코드이다. 이 복음의 가치, 이 복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기쁨코드를 가지고 산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좀 의아스러운 것은 우리도 복음을 아는데, 우리가 정말 바울의 그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오면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교회 밖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인데, 교회에 들어오니까 복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복음이란 뜻이 ‘기쁜 소식’이란 뜻도 배웠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했더니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라 배웠고, 우리는 복음은 안다고 자부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바울처럼 우리는 이 복음이 우리의 기쁨 코드가 되느냐하는 것을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손해보고 잃어버린다할지라도 이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못하는 뭔가 다른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말하는 이 복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더 심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못보는 다른 어떤 것을 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주권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12절에서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복음전도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에는 인류의 소망이 담겨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복음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자기가 쇠사슬에 매여있는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13절에 보니까 로마의 친위대와 기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말한다.

(빌 1:13,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가택연금상태로 있다가 어느 시점부터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있는 죄수가 되었는데, 쇠사슬에 매여있는 경우에 로마의 친위대원들과 4시간씩 함께 묶이게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네시간에 한번씩 새로운 로마친위대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로마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제들이 직접 뽑는 사람들로서, 12년간을 일하게 되며, 로마에서 가장 보수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12년간의 봉사를 마친후에 이들은 로마사회에서 엘리트로서 지도자들이 된다. 로마를 전도하기 위해서 이들만큼 전략적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네시간씩 이 친위대원들은 바울 옆에 매이게 되고, 이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다. 바울은 최소 2년간을 이렇게 매여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가 직접 복음을 개인적으로 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4,380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친위대원들은 로마 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되었고, 그 결과 로마의 황실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네로황제가 자기 엄마와 아내, 자녀들을 죽이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복음을 위해서 내 삶을 사용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실패이고, 고난이고, 시련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이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은 우리 신자들의 기쁨의 암호코드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여기서 내 모든 것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인생의 우선순위

바울은 또한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인생이 혼란스러울 때 정말 보아야할 것은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것 말고도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17절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그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빈자리를 이용하여, 복음전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경쟁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괴롭다. 뭐든지 다 경쟁으로 생각한다. 제가 전에 있었던 지역에서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교제하는데, 한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우리는 다 경쟁관계가 아니냐? 사실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한인교회가 여럿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좋게만 비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한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 어느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다 보여줄 수 없다. 한 교회안에서도 여러 지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한 교회가 모든 지체노릇을 할 수 없다. 한 교회는 손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입의 역할을, 어느 교회는 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본 훼퍼 목사는 한 교회가 자신을 전능한 단체로 보기 시작할 때 공동체의 위기가 온다고 했다. 각 교회가 잘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기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다. 교회가 경쟁적인 모습으로 나가면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시대에도 그렇게 경쟁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그들의 경쟁심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18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What does it matter? The important thing is...."

이들의 경쟁심 잘못이다. 동기 잘못되었다. 태도 잘못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겠다. 만일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우선순위를 보았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다른 무엇보다더 소중한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12절에서는 단지 ‘복음전파의 진전’이란 말을 썼는데, 14절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것’으로, 18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분이었다. 20-21절을 쉬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빌 1:20-21, 쉬운) [20]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살고 죽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는 담대히 말한다. “내게 사는 목적은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돈이니....”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재미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생의 재미거리를 찾아다닌다. 어떤 이는 “내가 사는 목적은 권력, 지위, 인기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들이지만, 문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도 한 때 이런 것들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빌립보서 3:7-8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빌 3:7-8, 쉬운) [7]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8]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세상의 다른 것들이 오히려 쓰레기처럼 보이기 만드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연속적으로 비극이 일어나고, 고통이 발생하지만, 그는 기쁨의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만날 수록 더 큰 기쁨이 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비교하면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3.사람들의 소망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빌 1:25, 쉬운) 내가 여러분 곁에 머물러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또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고싶어하는 것은 단지 이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27-28을 봅시다.

(빌 1:27-28, 새번역)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27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알렐산더 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로마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빌립보는 옥타비안누스의 중요한 기지가 되고, 그 이유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는데,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로마 본토인과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인두세 등 여러 가지 세제혜택이 주어졌다. 이들은 로마인의 옷을 입었고, 로마의 관습을 지켰고, 로마인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이 공백을 돈으로 채워보고, 인기로 채워보고,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로마의 시민권이든, 호주 시민권이든 그런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은 오직 복음만이 채울 수 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보았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인생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담대히 사람들이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복음의 암호코드이다.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복음은 사람들의 소망이다. 사람들은 이 복음안에서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소망을 발견한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은 행복한 사건들이 아니지만, 그는 기뻐하고 기뻐했다. 그에게는 기쁨의 암호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기뻐하며 살았다.

여러분에게 이런 복음의 암호코드가 있는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복음은 이런 복음인가?



2009. 8. 14.

빌1:6 그래도 우리는 확신합니다

2009. 8. 2.

눅19:28-40 we are donkeys

눅19:28-40 We are donkeys

우리들에게 소나 말에 비하면 당나귀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어릴 적 옛날 이야기나 이솝 우화에서 당나귀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당나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타고갔던 당나귀이다. 본문에 나오는 당나귀는 어른 당나귀가 아니라 새끼 당나귀, 영어로 colt라고 하는 당나귀이다.

성경은 이 어린 당나귀가 감람산 근처의 어느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당나귀는 감람산 너무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감람산 너머에 예루살렘이 있었다.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도시의 중심은 성전이었다. 이곳은 인류의 중심지였다.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영향력의 중심지였다. 이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메시아에 대해서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의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우고 역사, 문화, 종교, 영향력의 중심지로 나아갔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자리까지 나아갔다. 이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간 곳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 되었다. 세상 변화의 샘터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변화되는 현장이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어린 당나귀에게 얼마나 놀라운 날인가?

이 어린 당나귀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에 이렇게 쓰임받을 수 있었을까? 30절을 쉬운번역으로 읽어보자.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당나귀는 사람들이 타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나귀는 그동안 한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새끼였다. 예수님이 이 어린 당나귀를 타고 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어린 당나귀가 말해주는 바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그 도구로서 이런 어린 당나귀같은 것들을 사용하신다. 아직 너무 어려서 사람들을 태우기에 적당치 않다고 여겨지는 당나귀, 아직은 준비가 안되었다고 여겨지는 당나귀들을 사용하신다. 세상에서 닳고 닳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 경험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은 어리다고 여겨지고, 부족해 보이고, 아직은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 당나귀는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그런 방법으로도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 어린 당나귀처럼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쓰신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늘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쓰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교회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 다른 교회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가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 “다른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판박이처럼 똑같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타보지 못한 당나귀, 예상하지 못한 당나귀를 사용하셨듯이 교회를 늘 새롭게 사용하신다. 어떤 교회는 찬양사역을 통해서 쓰임받을 수 있고, 어떤 교회는 한글학교를 통해서 쓰임받을 수가 있고, 어떤 교회는 교우들을 잘 돌보는 것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나름대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비전과 사명이 다르고, 교회의 리더십 체제가 다르고, 목회의 초점이 다를 수 있다.

일반 기업들을 생각해보라. 삼성기업이 현대나 대우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기업들마다 자기들의 방식이 있고, 품목이 있고, 전략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모두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방법에 매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써오는 방법이 아니면 새로운 것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얼마든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들이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주시는 아이디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 앞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 어린 당나귀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타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사람들이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이 당나귀는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당나귀는 또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나귀는 그냥 마을 한쪽에 매여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구도 이 어린 당나귀를 눈여겨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새로운 어디를 찾아가려면 긴장한다. 네비게이션을 키고 일러준대로 왼쪽, 오른쪽, 직진... 골목 골목가다가 때대로 GPS가 인도한 곳이 엉뚱한 곳일 수도 있다. 이 당나귀는 그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 있지 않았다. 그냥 흔히 볼수 있는 그런데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 사람들이 특별하게 보지도 않고 눈여겨 보지도 않는 그런 것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그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것들, 이 상황들, 이 사람들, 이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재능도 사용하실 수 있고,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 마치 그 어린 당나귀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라. 이 당나귀는 예수님이 앉으신 이동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이 당나귀는 풀여야 했다.

묶여있던 당나귀는 풀려야했다. 묶여있는 당나귀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나귀를 풀어라”. “그리고 내게로 데려오라”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삶 속에 있다. 그저 풀기만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을 묶어놓은 것은 없는가? 누군가 교회를 잠자는 거인이라 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이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의 성도들 안에 있는데, 그 잠재력들이 잠자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귀를 풀라.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나귀를 풀지않으면 안된다. 여러분의 걱정 때문에 묶여있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묶여있고, 아직은 때가 안됐다.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고 묶여있지는 않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 어린 당나귀도 준비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타본 당나귀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리다고 생각하는 당나귀였다. 나귀를 풀줄 아는 세대가 되자.

주님께서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로 데려오라”

주님께서는 33-34절에 이렇게 말한다.

(눅 19:33-34, 공동) [33]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34]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세상에는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나귀들이 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한다.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을 쓰시고 싶어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이 사용하신다고 했을 때, 세상은 이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음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비즈니스가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저널리즘이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다. 정치도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면,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윌버 포스

혹시 “Amazing Grac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세기 영국의 하원 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그는 노예무역에 대항해서 강력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서너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운동에 함께 참여하며 서로에게 헌신했고 그 거대한 악을 바로잡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이들은 런던 외곽에 있는 클래펌 지역에서 모여 살아 나중에는 클래펌파 (Clapham Sect)로 알려졌다. 20년 동안 이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전쟁을 치르듯 싸웠다. 어떤 해에 의회가 투표를 통해서 이들의 제안을 폐기해 버리면 바로 다음 해에 또 제안했다. 득표수가 적어 다음번 투표 때까지 2년 동안 일을 진행시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노예제도는 대영제국에서 매우 이윤이 큰 사업이었다. 리버풀에서 출발하는 500척의 배가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로 또 거기에서 미대륙으로 다니면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장사를 했다. 노예무역상이 벌어들인 수천 파운드의 돈 중에서 상당 부분은 하원 의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만나서 3시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했으며, 영국 전역에 소책자와 안내지를 배포했다. 또 하원에서 몇날 며칠을 서서 정의를 외쳤다. 드디어 1807년, 20년 동안의 싸움 끝에 노예무역이 의회의 투표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1833년 윌버포스가 임종을 맞이할 무렵에는 노예제 자체가 대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되었다. 윌버 포스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하나님이 이것은 내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영역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정치도 하나님의 것이다. 골퍼로서 하나님님께 영광돌릴 수도 있고, 회사 경영자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고, 우리의 음악으로, 영화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정치인이 되라. 음악가가 되라. 영화PD가 되라. 이것들을 예수님이 사용하시고, 예수님이 타고가시는 어린 당나귀가 되게 하라. 사업을 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경제윤리를 생각하며 본이 되는 사업가가 되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귀에 태워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태우기만 한다면,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업, 정치가 예수님의 어린 당나귀가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어린 당나귀를 쓰시는데 미안해하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쓰게 돼서 미안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은 교만하거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날 그 당나귀를 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이시다. 그러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재능과 재주를 쓰신다면, 여러분의 삶을 사로잡으신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쓰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이 나귀에 타고 계신지만 확인하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은 절대 사과하지 않으셨다.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행진하시자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온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열정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기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하셨는지 아시는가? “저들이 나를 경배하지 않으면 돌들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 물러서거나 걱정하지 말라. 찬양과 경배에는 어떤 힘이 있다. 나귀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 누가 찬양을 인도하고, 누가 노래를 부르고 누가 악기를 연주하는가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찬송가를 부르느냐 복음송을 부르느냐, 악기를 사용하느냐 안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어린 나귀들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 임재하시고, 여기 함께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나귀에 대해서 너무 매혹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 열정있는 교회가 되자. 이점에 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세상에 대해서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자.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과해야한다고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기 때문이다. 나귀에 앉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나귀에 앉으신 주님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귀에 앉히셨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미안해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으셨다. 당시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었다. 이 성전을 나의 집이라 부르셨다.

(눅 19:45-46, 새번역) [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집은...’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내 집이라고 부르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심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당신의 성전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구약성경에서는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다. 지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예수님이 당나귀 위에 앉으신 것에 대해서 사과하실 것 같은 상황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강하고 담대해야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나귀에 앉으시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셨다. 그의 열정, 그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말이다.

(눅 20:1, 새번역)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실 때에....

물론 예수님이 복음이시다. 예수님은 복음과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셨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그분은 물러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기회가 있다. 주님께 영광돌리고 경배할 기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지으시겠다고 하신 것을 지을 기회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할 기회가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씨를 뿌리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에 두셨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가지시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사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강하게 서시라. 예수님 안에서 신자로서 강하게 살라. 오늘은 물러설 날이 있다. 오늘은 앞으로나아가는 날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사용하실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여러분의 당나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당나귀 위에 예수님이 타시면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상상도 못할 것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노력이나 무엇이든지 그것을 당나귀로 보라.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

예수님을 태우고 감람산을 내려오는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당나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일꾼이며 이동수단일 뿐이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찬양하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 앞에 깔았다. 나귀가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선하 아이디어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교회일 수 있고, 목장교회일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의 재능과 재주일 수 있다. 그러나 당나귀에 현혹되지는 말라. 절대로 그것이 주인공이라고 우쭐거리지 말고 혼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교회는 빌딩,프로그램, 조직, 설교, 사람들, 재정... 그러나 이것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나귀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나귀 위에 계실 때에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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