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6.
2009. 4. 20.
2009. 4. 13.
요21:15-17 가정의 부활-09.4.12
1965년 7월에 영국 웨일스의 시골에서 태어나 엑세터대학 University of Exeter, 불문과를 졸업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25세가 되든 해인 1990년에 두 가지 일을 이 여자는 당하게 됩니다. 하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임시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영어강사를 하기위해서 포르투갈로 떠납니다. 거기서 한 저널리스트 기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 그녀는 1992년에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 제시카 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생활은 1년 만에 파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별수 없이 어린 딸을 안고 이 여인은 다시 조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자기 여동생이 살고 있던 에든버러로 돌아와서 단 방 한 칸짜리의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서 거기서 정착하게 됩니다. 이 딸에 대한 보육비로 3년 동안 주당 69파운드의 정부생활비 보조비를 받고 있었는데 때로는 이 보조비마저도 끊어져 아기에게 우유를 먹일 수 없어서 맹물을 먹여야 하는 그런 비참한 생활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이 여인은 병원에서 우울증으로 진단받기도 하고 자살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어느 기차여행에서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가지고 동네의 한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1996년 6월 구식타자기로 타이핑된 완성된 원고는 12개 출판사로 보내보았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맙니다. 1년이 지나서 블룸스베리 Bloomsbury 라는 런던의 한 작은 출판사에서 출판해 보자고 해서 그 이야기가 출판되었습니다. 바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해리포터와 불의 잔”“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해리포터와 혼혈왕자”“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을 써 전 세계에 4억 부 이상의 책을 팔아 해리포터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조앤 롤링의 이야기입니다. 조엔 롤링은 2008년도에 영국에서 12번째로 부유한 여인으로 집계되었고, 2007년도 포보스에서는 이 여인을 전 세계에서 46번째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 자살까지 생각해야했던 그 죽음의 지경에서 일종의 부활을 경험한 생생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이 여인처럼 멋지게 인생의 부활을 경험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 베드로는 원래 유대 갈릴리 지방의 어부출신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랐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만찬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베드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죽을 지언정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바로 그날 저녁을 지나고 새벽이 오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정의 이상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성경적인 결혼관, 부부의 비밀, 성경적인 자녀양육, 부모공경, 오아시스 같은 가정 등에 대해서 성경적인 말씀, 성경적인 이상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베드로의 현실”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가정의 현실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는 말이 그의 진심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결혼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은 죽음이 갈라놓기까지 생의 어떤 역경이 와도 서로 사랑하며 지낼 것을 약속하고 가정생활을 출발합니다. 아마 나름대로 이상적인 가정생활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그리고 잘 지내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진심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시작하는 이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 그러나 진심어린 마음과는 달리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린 베드로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의 진심과 달리 어떤 상황에서 우리도 무너져 내릴 수가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죄를 범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불성실할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추하고 역겨운 인격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약속했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서로에게 실망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정서적 이혼상태 속에 있는 가정들이 꽤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정의 죽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성경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듯이 우리들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고, 죄를 범할 수 있고, 나약해질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는 우리의 실존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비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우리들 속에는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는 죄의 본성이 남아있고, 인간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나약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는 추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는 잔인해지는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현실이었습니다.
●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남편은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절대 그럴 리가 없어”라고 누가 과연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는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 있는게 우리들입니다. 다윗처럼 죄를 범할 수 있는게 우리들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는 죄의 뿌리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의 뿌리 깊은 죄성을 보아야 합니다. 가정이란 죄인들이 서로 만난 것뿐입니다.
●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네가 닭 울기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베드로는 나가서 통곡을 합니다. 자기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 그리고 얼마 후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21:3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 만나기 전, 원래 베드로는 그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19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그 이상과 비전을 다 포기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어느 순간에 사랑을 포기하기도 하고, 희망을 포기하기도 하고, 배우자를 포기하기도 하고, 자녀들을 포기하기도하고, 가정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고기 잡는 그 바다는 베드로의 꿈의 죽어버린 현장이었습니다. 가정이 가정으로서의 생생함을 다 잃어버린 죽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베드로가 꿈을 포기하고 서있는 갈릴리 그 바닷가에 있을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복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재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도행전을 잃어보면 초대교회의 부흥의 현장에 베드로가 있었고, 성령이 역사하는 한 가운데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고, 복음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설교하자 3000명, 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일제히 회심하고 성령 받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했던 베드로가 어떤 일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멋지게 재기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 우리는 성경에서 단 한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꿈을 포기하고 내려갔던 그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 외에는 베드로의 재기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재기를 베드로의 부활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꿈을 잃어버렸던 베드로가 다시 꿈을 되찾았습니다. 주님에게서 멀리 도망갔던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자리까지 기꺼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 만약 베드로가 가능했다면, 우리들의 가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그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복될 수 있었다면, 우리들의 가정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정의 회복을 <가정의 부활>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관계가 죽어가고, 희망을 포기하던 가정도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죽었던 자가 살아나오듯이,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희망을 느끼고, 저주처럼 여겨지던 가정이 축복의 장소로 회복되는 것이 가정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소망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떻게 이런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가정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1. 용서를 배우십시오.
● 베드로는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기에 주님마저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의 죄책감 때문 이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제자를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상대하시지 않으실 거야,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으실 거야 이렇게 생각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의 이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은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 첫째로 주님이 찾아오셔요.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도망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 둘째로 베드로를 향해서 변함없는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타락과 배신 이후에 최초의 만남의 장면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주님은 바닷가에서 생선요리를 만들어놓고 이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선요리의 향연을 준비하고 제자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첫마디 음성이 뭔 줄 아세요? 내가 만약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나는 무슨 얘기를 할까 저는 아마도 이런 얘기를 했을 것 같아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 않다면 ‘야! 너 무슨 연유로 나를 배신했니?’ 이렇게 한 마디는 따져 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 일성이 뭔 줄 아세요? 베드로를 향한 제일성이 다른 소리는 없었어요. ‘와서 조반 먹어라’ Come and have breakfast. ‘조반 먹어라’ 춥지? 배고프지? 식사해, 주님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셨습니다.
● 셋째로 예수님은 사랑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라고 되어있는데, 대화는 식사 후에 시작됩니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좀 얘기하자!’ 이랬으면 소화불량 걸렸을 꺼에요. 그런데 주님은 기다리셨어요.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이 말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물론이고 내가 너와 더불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 자, 몇 번 물어셨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베드로는 세자리 숫자 알레지의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랬어요?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그런데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시는 이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베드로의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 이런 일을 통해서 베드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용서하셨구나.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이것이 베드로가 일어날 수 있었던, 재기 할 수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 베드로가 경험한 부활의 주님은 용서의 주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용서는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베드로의 현실,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가능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용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서 갈릴리 바다의 베드로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 이 부활절 날에 우리는 가정의 부활을 위해서, 용서의 힘을 얻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용서가 있게 될 때, 가정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용서가 있게 될 때 가정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모든 미움도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구하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우리의 가정도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려고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곳에 가자 파코란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800이나 모여있었다고 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서 가정들이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비전을 회복하십시오.
● 매우 일상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내 기대를 저버린 내 제자, 나를 배신하고 떠나간 제자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 주님의 용서를 보여주셨고, 비전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만난 부활의 주님은 비전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물으신 후에 주님은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셨습니다.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어린양을 먹이라고,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 주님은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에게서 기대를 철회 하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God offer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한 번의 실패로 ‘나는 너하고 일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또 기회를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실패가 있었지만,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배반했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지워버리고 싶은 방탕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성자라 불리운 뒤에도 여자의 유혹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뇌했었습니다. 루터도 교황의 사형선고를 받고 문을 닫고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의 존경받는 원로 한경직 목사도 일제 (日帝) 때 신사(神社)를 참배했습니다.
● 우리의 가정도 실패와 아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여전히 양떼를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여전히 부탁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들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통해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십시오. 다시 꿈꾸십시오. 다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정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 대한 비전을 회복하십시오.
3.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 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타락직전에, 실패직전에 이런 말씀을 주셨다면,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 염려 붙들어 매세요 저는 주님을 위해서 옥에도 가고요. 죽을 준비도 다 되어있습니다’ 아주 자신 만만하게 당당하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자신 만만하게 베드로는 잠시 후에 넘어졌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아마 타락이전에 실패이전에 베드로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주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아마 타락 이전이라면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했을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떤 톤으로 말했을까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니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쩔쩔 매면서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 아시잖아요’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후자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어요. 자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겸손히 무릎 끓고 주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 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생애에 마지막에 펼쳐질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18절에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중요한 두 가지 대조적인 단어가 있어요. ‘젊어서는’ 그 다음에 어떤 단어입니까? ‘늙어서는’ 젊어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다녔다 네 충동대로, 네 본능대로, 네 느낌대로 네 마음대로 살았지,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넘어지고 그러나 늙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따라오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이후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받고 담대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 이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부활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 가정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신뢰하는 부분들은 철저히 깨뜨리십시오. 그리고 다만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놀랍게 쓰셨습니다. 잠시 후 오순절에 부흥운동이 폭발했을 때 이 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서있었든 주역이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바로 베드로 이었습니다. 이제는 피상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베드로가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을 알았기에 엎드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그는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2009. 4. 6.
2009. 4. 5.
요12:1-11 오아시스 같은 가정-09.4.5
오늘 설교말씀은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Passover”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유월절 엿새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유월절>이란 표현은 어떤 중요한 사건이 유월절에 발생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3장 1절에서도 <유월절 전에>라고 말함으로써 ‘유월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4에 다시 유월절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그리고 16절을 보십시오.
16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었던 유월절 명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유월절>이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유월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에 <유월절 엿새전에>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 엿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의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마지막 행보를 옮기십니다. 12-13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12: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늘은 종려주일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결국 예수님은 이 주간의 마지막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 주간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무겁고 힘든 한 주간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힘겨운 길이었고, 그 고난의 주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무서운 고난의 주간에 앞서 예수님께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드린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이 바로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있던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정을 통해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셨습니다. 이 가정을 통해 사랑을 받고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정을 통해서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를 향해 담대하게 나가셨습니다.
요즘 참 어렵다고들 합니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평범한 한 주간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한 주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지루한 한 주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살고 싶고 붙잡고 싶은 한 주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평범한 한 주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눈물로 지새우는 한 주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의 가정이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가정이 그런 기쁨을 예수님께 드렸듯이, 또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에게,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격려를 주는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가정은 어떻게 이런 기쁨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또 우리의 가정이 이런 오아시스 같은 가정은 어떤 모습의 가정일까요?
1. 감사가 있는 가정입니다.
나사로는 11장에서 병들어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이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아마도 그 이후의 나사로의 삶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이제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새로운 기회” 혹은 “두번째 기회”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어떤 의미에서 “덤”으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셔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용서함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이유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면, 이제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음 받은 우리를 지금 당장 데려가셔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우리를 살게 하심은 “덤”으로 주신 것입니다. 보너스입니다.
나사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언제나 감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1:2에 보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의 잔치는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 큰 위로가 격려가 되었습니다.
오아시스같은 가정은 감사가 있는 가정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서로에게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서로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샘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자녀들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이곳생활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감사할 조건이 없다고요?
그러나 때로는 전혀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감사하지 않을 일로 감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 세월이 흘러가며 머리카락을 잃어버리고 대머리가 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전광씨가 지은 ‘평생 감사’라는 책에 보면 대머리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무려 여섯 가지나 된다는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대머리는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해야 한다.
2.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이다.
3.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다.
4.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다. 엘리사도 대머리였다.
5.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다.
6.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린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이다.
감사가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2. 섬김이 있는 가정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마리아이고, 또 하나의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마르다가 나올 때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마르다는 음식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불평이 있긴 했지만, 마르다는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가 마리아 때문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음식준비하는 것 때문에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는다고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마음에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소연했더니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시면서 네 마음이 “분주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섬기는 태도를 경고하신 것이지, 이 여인의 섬김 자체를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섬김”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며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게 되는데,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혹은 선생이라 부르는데, 좋다, 나는 너희들의 주와 선생이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들을 발을 씻겼던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어라” 예수님이 먼저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섬김 자체를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정의 섬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강조하는 것 한가지가 손님대접아닙니까? 이렇게 섬기고 대접하다가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섬김 뿐 아니라, 가족들이 서로를 섬겨주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은 오아시스 같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가정이 각박해지는 이유는 모두 섬김받기 원하지 먼저 섬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접받기 원하지 먼저 대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섬김받기만을 원하면 가정이 지옥같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먼저 상대방을 섬겨주면 가정은 천국 같은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모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먼저 간 곳은 지옥. 지옥은 불구덩이와 고통의 절규가 넘칠 것 같았는데, 막상 본 지옥은 의외로 평안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두가 무지 긴 젓가락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두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지만 어른의 팔보다도 두배가 넘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모두들 있는대로 찡그린 채로 먹는데에 모든 정신을 쏟아 부었지만 입에 넣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허기짐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옥을 둘러본 이 사람은 얼른 천국을 보고 싶었습니다. 안내하는 천사에게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바로 옆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생각보다 천국이 가깝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천국이 지옥과 별다른 것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천국에 있는 이들 역시 자기 팔보다 두 배는 긴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달랐던 것이 있었다면 그들 모두는 나름 배부르게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는 것.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음식을 집어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섬겨주는 가정이 오아시스같은 가정입니다.
3.희생이 있는 가정입니다.
이 집에는 마르다말고, 마리아라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매우 귀한 헌신을 합니다. 매우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 향유의 가치는 약 300데나리온, 보통 1년 정도 열심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유대여인들의 평생의 소원은 자신의 결혼식 때 아주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여인의 희생을 비난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낭비다. 차리리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을 뻔 했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일면 이해도 갑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았습니다. 8절에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많이 있다는 말씀으로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의 헌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가 아무리 헌신해도, 아무리 희생해도 그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도 공부에서도 수석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의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캠퍼스 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 그리고 돈과 명예,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C. T.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거기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헌신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의 희생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희생은 예수님께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여인의 희생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 직전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희생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요? 이 여인의 희생은 예수님의 마음에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아시스같은 가정은 희생할 줄 아는 가정입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헌신할 때, 삭막한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1982년 로마 교황청 앞에 교황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였습니다.
1941년의 일입니다. 한 명의 수인이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나치는 본보기로 10명의 수인을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불려나오는 사람은 물조차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아사(餓死)감방 행입니다. 사람들은 아사 감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알기 때문에 공포에 질렸습니다. 무작위로 처형자가 불려나와졌습니다.
10명이 다 불려졌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내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꼴베 신부는 천천히 수용소 소장 앞으로 나서면서 "나를 대신 죽여주시오. 나는 딸린 가족이 없소. 저 사람 대신 나를 보내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수용소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런 청을 하자 쾌히 허락했습니다. 이 때 꼴베 신부의 나이는 47세였습니다.
아사 감방에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속옷을 입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먹을 것은 물론 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살아날 희망은 조금도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서는 완전히 짓밟혀버렸습니다. 꼴베 신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며, 동료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망가진 마음을 받쳐주며,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 전까지 아사 감방에서는 절망과 고통,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뿐이었지만, 이 때만은 기도와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9명이 다 죽어 나가고 신부가 최후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17일간 살아남았습니다. 나치는 신부에게 독주사(훼콜산)를 놓아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최후의 한사람이 되어서도 신부는 고결함을 유지했습니다.
이 승리의 소식은 살아남은 수인들에게 전해졌다.
"아우슈비츠에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꼴베 신부의, 사랑의 죽음을 알았을 때,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살자, 끝까지 살아남자.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는 힘이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그 마음의 변화를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아담이라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꼴베신부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닮았습니다. 꼴베신부의 희생이 삭막한 아우슈비츠를 감동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희생당하신 그 십자가는 사막같은 우리의 인생의 오아시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막에 다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이 메마른 땅이 다시 장미꽃처럼 피어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가정을 다시 오아시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