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7.

빌3:18-21 1+1+1=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사람들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사라지는데, 그 지하실에는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있다. 그 문 앞에는 수수께끼 질문이 나오는데, 그 질문은 성냥개비 6개로 정삼각형 4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1+1+1=1로 했다. 여러분, 사실은 천국의 문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 어떤 분은 오늘 목사님이 무슨 이상한 얘기를 하시려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공식이다. 이 수수께끼는 빌립보서에 숨어있고, 여러분은 빌립보서에서 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 한가지 힌트를 드린다면 이 수수께끼는 ‘구원’이란 말과 관련이 되어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1+1+1+1이라는 공식의 각각의 1은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알아야 한다. 각각의 1에는 하나님 세가지 약속이 숨어있다.

첫 번째 1은 빌립보서 1:28-29에 숨어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 28절에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신앙의 핵심은 구원체험이다. 종종 교회생활을 오래하면서도 전혀 구원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구원체험이 없으면 사실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다시 말하면 내가 구원체험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가 상관없이,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랫동안 다녔는지 상관없이, 내가 얼마나 교회에서 봉사했는지 상관없이 이 구원체험이 없이는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다.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이 구원체험이 있었는가? 당신은 구원받으셨는가?

●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생은 고달프고 눈물나는 세상이다. 이민생활도, 유학생활도 만만치 않다. 어떻게 기쁘게 살 수 있는가? 환경만 바라보고는 절대로 기뻐할 수 없다. 사람만 쳐다보았다가는 여러분은 피눈물나는 실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전혀 다른 기쁨이다. 이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구약의 다윗은 이것을 <구원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체험이 먼저 있어야 한다.

●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구원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빌립보서 1장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1장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구원체험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말은 다른 말로 ‘선물’이란 말이다. 선물을 값없이 받는 것이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돈을 내야한다면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첫 번째 깨달아야할 것은 구원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선물이다. 영생은 선물이다.

● 여기에 첫 번째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영생은 선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공로를 쌓아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 이것이 첫 번째 1이다. 잘아는 말씀이지만 다시한번 인용하고 싶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두 번째 1은 빌립보서 2:12-13에 숨어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여기서도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1장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이 구원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 태어나는 출생과 같다. 어느 한 시점에서 내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극적으로, 어떤 사람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깨달아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지고,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오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1장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 그런데 2장에서는 구원은 조금더 폭넓은 뜻으로 쓰인다. 2장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예수님을 다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내 말과 내 행동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나타날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구원은 반드시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구원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연결되지 않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향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은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내가 받은 구원은 평생에 걸쳐 예수님을 닮게 한다. 그러므로 2장에서 말하는 구원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점진적인 과정이다. 오랫동안의 마라톤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맞고,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말도 맞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죄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 순간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평생걸린다.

●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이런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해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변할 수 있을까? 종종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절대로 안변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나는 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면 나는 변할 수 있는 줄 믿는다. 그런데 13절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내 속에 있으면서 나의 변화를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말씀이다.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까지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희망을 갖는다.

● 여기에 대해서 짧은 영상물이 있는데, 함께 보자.

­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다. 3불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을 닦는다. 그리고 핸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을 황홀하게 한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회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만에 너를 만졌구나."하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고, 결국 이 바이올린이 3천불에 낙찰된다는 내용의 시이다.

­ 무엇이 이 변화를 일으켰는가? 바로 바이올린의 거장의 손을 거쳤을 때 3달러짜리 인생이 3000불 짜리 인생이 될 수도 있고, 3천억불의 인생으로도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그 거장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고 그 손으로 우리를 다듬기를 원하신다. 그 예수님의 손길 가운데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세 번째 1은 빌립보서 3:20-21에 나와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여기서도 구원이란 말이 나온다. 1장에서는 구원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2장에서 구원이란 한 평생 걸려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3장에서는 구원이란 언젠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21절에 나와있는데, 우리 몸이 예수님 몸처럼 변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낮은 몸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것은 이 땅에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래에 되어질일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 여기서 우리 몸을 <낮은 몸>이라 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병에 걸리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약해지기도 한다. 이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고뇌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여전히 질투하고 욕심내며, 여전히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그분을 닮아가도록 일하시고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낮은 몸>의 신음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완전한 천국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내 속에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불뚝불뚝 튀어나오기도 한다.

● 이땅을 살면서 인간의 낮은 몸을 가지고 살기에 인간 사이에 소통되지 못하는 불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서로를 의심하고 오해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해서 한 순간에 마음이 돌아서기도 한다.

● 어느 노부부 이야기

­ 어느 60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차이로 이혼을 했다. 이혼하는날 그 노부부는 이혼 처리를 부탁했던 변호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다. 통닭이 나오자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찢어 할머니에게 권했다. 함께한 변호사는 그 모습이 워낙 좋아 보여서 어쩌면 다시 화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가 기분이 아주 상한 표정으로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 30년 간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 하는 날까지도 이러다니, 난 다리 부위를 좋아한단 말이야”

­ 할머니의 그런 반응을 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 날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삼 십 년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 하는 날까지...?”

­ 화가 난 노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자꾸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나는 한번도 아내에게 무슨 부위를 먹고 싶은가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주면 좋아하겠거니 생각했지, 내가 잘못한 일이었던 것 같아. .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할아버지가 건 전화임을 안 할머니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할머니는 아예 배터리를 빼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이 깬 할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삼 십 년 동안 남편이 날개 부위를 좋아하는 줄 몰랐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준건데, 그 마음을 모르고 내가 화만 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아직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인데”

­ 이렇게 생각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안받아서 화가 났나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할아버지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 핸드폰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 미안해’ 사랑해‘

● 이것이 이 땅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인생의 한계이다. 결혼을 시작할 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을 가지고 시작하는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의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 그러나 약속이 있다. 언젠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 우리 몸은 이 땅의 몸이 아니라 천국의 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조그마한 일로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2009. 9. 20.

빌3:10-21 푯대를 향하여

빌3 10-21 푯대를 향하여

인생을 살아가는데 선배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나를 붙들어주고 충고해주고 안내해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멘토, 인생코치라고도 한다. 그런데 단지 말로만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보여주고 본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v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많은 영역에서 본을 보였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비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푯대>라고 말한다. 요즘은 달리기 경주의 마지막지점에 테이프로 들고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지만, 예날에는 골인지점에 하나의 푯대, 하나의 깃발을 세워둔다. 경주자들은 그 깃발을 바라보고 달렸다. 바울은 자기 인생에는 분명한 푯대가 있다고 했다. 모든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에게는 비전과 꿈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전과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통해서 꼭 이루고 싶은 푯대가 있었다. 그러나 말로만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비전과 푯대를 향해 전심전력으로 달렸다고 말한다.

12-13절은 끝날 때 마다 “달려가노라...달려가노라”라고 말한다. 그는 종종 인생을 달리기로 묘사했다.

고전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전과 꿈이 없이 살아간다. 그냥 안주하며 살아간다. 자칫잘못하면 이민생활은 비전과 꿈의 무덤일 수 있다. 더 이상 추구하는 목표도, 비전도, 꿈도 없이 그냥 삶에 편안하게 안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민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 이민생활에 안주하지 않게 해달라고..그저 자녀들이나 잘키우는게 꿈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비전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꿈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인생이 달리기라면, 달리기를 포기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자기가 이미 그 목표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아무리 뛰는 것을 좋아하고, 잘 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뛰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이미 목표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뛰지 않을 것이다. 골인지점에 와있는데 뭐하러 뛰겠는가? 절대로 안움직인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달리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말했다. 12-14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자기가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목표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쓴 사람이었다. 로마 전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웠던 사람이다. 디모데와 디도를 비룻하여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양성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견줄만한 사람이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람들이 왔다고 말했다. 어떤 영어성경 번역에는 이 사람들은 세상을 upside down 시키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이만큼 바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이룬 줄로 생각하지 않는다. 목표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차선이다. 작은 성공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큰 성공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이룬 자그마한 성공에 도취되어 있으면 나는 안주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작은 성공에 만족하는 사람은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이다. 미국 시카코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는 비전을 이렇제 정의했다. 비전은 거룩한 불만족이다. 비전은 거룩한 불만족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작은 성공이라는 미끼를 주어서 정말 뛰어야할 치열한 전쟁터에서 놀고 먹게 만든다. 진짜 전쟁은 오지 않았는데, 지엽적인 전쟁에서 이룬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진짜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뭔가 열의도 열심도 헌신도 없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교회였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교회가 등장하고 그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다른 교회는 조금이나마 다 칭찬을 받는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칭찬받지 못했다. 이 교회는 “덥지도 차지도 않아서 예수님이 토해내고 싶은” 교회였다. 그런데 이 교회 사람들이 이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시록 3:16-17)

이 교회 사람들은 자기는 부자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가난하고 가력한고 곤고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일 수 있다. 우리의 실상은 눈멀었는데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난한데 부자라고 생각하고, 벌거벗었는데 옷입었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 만족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뒤에 것은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룬 작은 것들도 잊어야 한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바울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역하며 선교하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는 아직 이룬 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난 주에 묵상한 내용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이전에 자랑할 것이 많았다.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율법에 정통했고, 하나님께 열심이었고,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파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자기가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자랑하던 것이 배설물이요 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도 내세울 것이 없는 하잘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그가 만난 예수는 대단했다. 그는 유대학자에게도, 헬라문화에서도 자라났지만, 예수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가 가장 고상했다. 그래서 말한다. 나는 이 예수를 알고 싶다. 예수를 알고나니까 자기가 이룬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랑할 것이 많았는데,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그 예수를 더 알고 싶었다. 그 예수의 능력을 맛보고 싶었다. 그 예수와 동참하고 본받고 싶었다.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를 알고 싶었다. 이제 그의 푯대는 바뀌었다. 예수가 이제 그의 인생목표가 되었다.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영국에 알파코스라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죽어가는 영국교회를 살리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닉키 검블이라는 목사님은 스쿼시를 아주 좋아하고 아주 잘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목사님이 스쿼시를 치고 있는 현장에 세계적인 스쿼시 선수가 잠깐 방문할 일이 생겼고, 함께 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경험을 닉키 검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쿼시를 잘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선수와의 짧은 게임을 통해서 내가 발견할 것이 있다. 나는 스쿼시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경력을 자랑할 줄 모른다. 우리가 좀 뭐했다는 것에 만족할 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예수를 만나보라. 그러면 당신은 결코 만족이 되지 않는 배고픔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알고 싶다. 예수를 더 만나고 싶다. 예수를 더 체험하고 싶다. 이 예수를 본받고 싶다. 이 예수와 더 친해지고 싶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갈증이요, 배고픔이다. 아직 이런 배고픔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감히 말한다. 여러분은 아직 예수를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말라. 예수를 위한 꿈을 가지라, 비전을 가지라, 예수 안에서 인생푯대를세우라. 그리고 그리로 달려가라.

어떤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동네의 공원을 갔다. 벤치에 앉아서 딸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아버지는 그 공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 동네 공원은 매우 지저분했고 깨끗하지 못했고 안전하지도 않다고 느꼈다. “이정도 밖에 공원을 만들 수 없는가? 아이들이 어떤 과학적인 탐구도 할 수 있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에서 미래의 꿈을 꿀 수 있는 어린이들만의 천국을 만들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이 아버지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이 아버지가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월트 디즈니가 가졌던 이 창조적인 불만이 바로 디즈니 랜드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인생은 달리기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달리기를 포기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적당한 성공에 만족하는 경우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주변 것들을 신경쓰느라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 오직 한일이라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한가지 일, 이것은 집중을 말한다. 태양은 따뜻하고 좋은 것인데,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면 종이도, 때로는 나무도 태운다. 이것을 고도로 집중시킨 것이 레이저 광선이어서 쇠로 된 것도 뚫는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동시에 100가지 일을 다할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1박2일이나 무릎팍 도사 같은데 나와서 별로 영양가 없는 얘기나 해대는 연예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데 절대로 나오지 않는 서태지같은 사람이 좋다. 가수는 노래로 승부해야하고, 배우는 연기로 승부해야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집중할 줄 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다. 여기서 달려가는다는 말은 <디오코>라는 말로 사냥개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갈 때 쓰는 말이다. 포수가 새에게 총을 써서 새가 어딘가 떨어지면 사냥개는 그 먹이감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거기에 온통 집중한다. 바울은 자기는 하나님이 주신 그 인생목표를 향해 그렇게 달려간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달리는 선수가 목표지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딴데 신경쓰면 우승할 수 없다. 우리를 산만케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배가 신이요, 땅의 일만 생각한다고 했다. 배가 신이라는 것은 먹는 것이 신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절대로 우리가 먹고 입는 것이 죄악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먹을 수 있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고, 좋은 집을 살수 있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 신이 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온통 우리의 관심의 전부가 되는 것이 문제다. 여러분, 한번 잡지를 보라. 음식, 옷, 화장품, 다이어트, 운동 등이 거의 전부다. 이런 것들이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우리 생각을 지배할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을 쳐다보느라고, 정말 우리가 쳐다보아야할 인생목표를 쳐다보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인생을 경주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선수가 땅만 쳐다보고 달리면 우승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우리가 목표삼아야할 것은 있다. 좋은 직장을 갖는 것,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목표일수 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는 것도 좋은 목표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예수회를 창설했던 익나티우스 로얄라(1491-1556)의 말은 인용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이 땅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이것들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는 한에 있어서는 다 사용할 수 있고,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면 이 모든 것들을 피해야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다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그 일을 하라. 원하는 직업, 직장이 있는가? 그것을 하라. 의사가 되고 싶으면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싶으면 변호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싶으면 정치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싶으면 음악가가 되라. 원하는 나라가 있는가? 그곳에 얼마든지 그런 나라에 갈 수 있다. 여러분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취할 수 있다. 다만 여러분이 창조된 목적을 잊지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여러분의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 의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엔지니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음악가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라. 그러나 절대로 음악가가 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목표라고 말하지 말라. 좋은 집사고 좋은 차 사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목표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비전을 갖되 더 높은 비전을 가지라. 대학 진학 이후의 비전을 가지라. 직장 너머의 비전을 가지라. 의사가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지 그 비전을 가지라.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 그것을 주님께 묻고 주님 안에서 그 소명을 찾으라.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하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달려갈 인생목표가 이 땅이 되면 여러분은 결국 후회하고 말 것이다. 이 땅은 지나가고 사람들은 변하고, 시대는 바뀐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이땅의 보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소명을 찾으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라.

척 콜슨은 하버드대학 출신이고,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고, 자신의 법률회사를 차렸고, 그리고 나중에 정치에 입문하여 40세에 닉슨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어 일하면서 King Maker 역할을 했다. 그리고 워터 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직전에 그는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된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그는 더욱 신앙이 깊어진다. 나중에 감옥에 나와서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 그는 지금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 꼽힌다. 한번은 라디오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저는 전에도 야망이 있었고, 지금도 야망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나 척 콜슨을 위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한 야망이 있습니다.”

인생은 경주다. 바울은 죽음을 앞둔 인생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은 나의 코스를 마쳤다는 뜻이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 평생 푯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달려갔다. 그는 주변 것들에 의해 마음 빼앗기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 그 소명을 향해 끝까지 인생을 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몇가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 나는 예수 안에서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

● 이 비전은 이 땅의 비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인가?

● 그리고 나는 이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2009. 9. 13.

빌3:1-11 기쁨 도둑














지난 3일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 10점이 도난당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경찰은 사업가 리처드 와이즈먼의 LA 자택에 가로 세로 1m 크기에 무하마드 알리, OJ 심슨, 축구선수 펠레 등 스포츠스타들을 그린 그림 10점을 감쪽같이 도난당했는데, 경찰은 현상금만 100만 달러를 내걸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월에는 최진실씨의 유골함이 도난당했었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땅에서 쌓아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는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빌립보서 3장에는 또 다른 도둑을 얘기한다. 바로 기쁨 도둑이다.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도둑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기쁨과 행복, 감사를 도둑맞는다. 이 도둑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는 평화가 깨지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어진다.

기쁨
말씀드렸듯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본문 1절도 이렇게 시작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성경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얘기한다. 환경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데도 샘물처럼 솟구쳐나오는 기쁨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종종 영광이란 말은 천국과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기쁨을 우리가 이땅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님 한분이 책을 하나 소개시켜 주셨는데,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란 책이었다. 루마니아의 목사님이신데,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곤 했다. 감옥안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고문을 당하곤 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감옥에 갇혀 아픔과 추위를 견뎌내야했고, 고문과 배고픔을 당해만 했다. 그러나 한 밤중에 나는 여러 차례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곤 했다. 내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은 환경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신앙생활하도록 돕는 분이시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기쁨이 있다.

율법주의
그런데 이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것이 있다. 이 기쁨도둑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문말씀을 요약하자면 이 기쁨도둑은 한마디로 율법주의(legalism)이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율법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이 들어왔다. 바울은 강경한 말들로 이들을 표현한다. 개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악한 일꾼이요, 할례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이다.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들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면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있다 하는 것들이 우리의 “의”가 되고 “공로”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면 나는 율법주의자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야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단의 특징이 무엇이냐? 이단은 그리스도 + Something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것도 해야한다. 이것이 이단이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대인들이었므로, 제대로 믿으려면 유대인들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되는 표식 중에 하나는 할례이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반드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정통 유대인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른 말로는 유대주의자라고도 한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이것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도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정통 유대인인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4-6절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먼저 자기는 태생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다는 점을 얘기한다.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이 말한바 8일만에 유대인의 표식이었던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정통 히브리인이었다. 이스라엘 초대왕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만이 정통 유대인이요, 다른 지파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면서 피가 섞여 순수 유대인의 피를 잃버렸다. 그래서 그는 베냐민 지파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바울은 ‘열심’ 때문에 자랑할 것이 많았다. 율법에 대해서는 웬만한 것은 다 지켜 흠이 없다고 얘기한다. 율법에 대해서 철저했던 바리새인 출신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전에 기독교회를 핍박하여, 어디 기독교인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이들을 잡아들이던 사람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었다.
바울도 한때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율법주의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기 자랑을 내세우고, 자기 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전통이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시에 반드시 사도신경을 낭송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은 반드시 까운을 입어야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사먹지 않는다. 어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참석을 매우 강조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복음성가는 절대 안부르고 찬송가만 부른다.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꼭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려야한다.
물론 이것들은 좋은 전통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pride가 되는 것이다.
나는 새벽기도도 하고, 나는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나는 전도도 잘하고, 나는 주일날이면 장사도 안하고, 나는 술담배를 안하고, 나는 세금을 꼬박꼬박내고, 나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한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신앙적인 자랑거리가 된다. 율법주의는 뭐냐하면 이런 것들을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내 안에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가 없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도망가버린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기쁨도둑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어떤 교회 다녔다, 어떤 봉사를 했다, 어떤 목사님 밑에 있었다, 어떤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다, 제자훈련을 받았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자랑이 될수도 있다.
나는 신앙적으로 무슨 체험을 했다, 방언을 받았다, 예언의 능력을 받았다, 기도의 불을 받았다...이런 신앙체험이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내는데, 문제는 이것이 자기 자랑거리,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2-3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자기 열심을 내세운다, 바울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이다. 또 그는 에베소서 2:8-9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의 ‘열심’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다. 내가 기도많이 하고 교회봉사 많이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물이라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만일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천국은 순전히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있을 것이다.
나는 주일예배에 한번도 졸지않고 예배드렸다, 나는 교회에서 찬양봉사했다, 나는 부엌에서 열심히 봉사했다...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신앙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사람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꼭 신앙적인 내용만은 아니다. 이런 신앙적인 율법주의 뿐 아니라, 사회적인 율법주의, 도덕적인 율법주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경력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자기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을 자기의 의로 내세운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은밀히 돕는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문화적 소양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인 감각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문학적인 깊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회적, 도덕적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것들로 얼마든지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숙 주인겸 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밤에 일어나 침대에 자고 있는 사람들을 묶고는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짧으면 침대의 길이만큼 늘여서 죽인다.
우리가 대단히 여기는 그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돌변할 수 있다. 내 열심히 기준이 되고, 내 경력이 기준이 되고, 내 도덕성이 기준이 되고, 내 선행이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바울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이요,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자부심을 느꼈다.

변화
그러던 바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7-8절을 봅시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던 그것들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유익하게 생각되던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되고,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여기 배설물이란 표현은 매우 점잖은 표현이다. 사실 이말은 똥이란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대단히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 문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가 안되서 답답해 했는데, 그게 똥이었다, 내가 교회 좀 열심 내는 것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그게 똥이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변화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이 변화일까? 신앙생활을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무엇이 변화일까?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예배자리에 와있으면 이 사람이 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렇게 10년 20년 교회생활 한사람이면 완전히 변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교회에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적으로 변화된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신앙인의 변화를 여러 각도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 예수 믿으면 분명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전에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던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바울이 경험했던 것들이다.
바울이 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 율법에 대한 자부심,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있었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똥처럼 여겨졌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신이 지금 중요하게 여겨는 것은 무엇인가? 안정적인 생활, 체면, 명성, 돈....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어느날 보니까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왔는데, 신앙을 갖고 보니까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더 중요한 꿈이 있더라. 이것이 변화이다.
여전히 교회 안에 있지만 세속적인 욕망이요, 세상적인 생각으로 앉아있다면,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좋아하고,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그대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에 그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똑같이 자랑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주장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했는데, 이제보니까 이게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제대로 신앙을 가진 것이다.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행위를 보면 나무랄데 없는데 율법주의자일 수 있다. 보다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야한다. 바울이 바로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 전에 유익하던 것이 해로운 것이라 깨달아지고, 오히려 똥처럼 여겨지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
그런데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다시 7-8절을 보자. 아까 7-8절을 읽을 때 중간 중간 몇 단어들을 생략했는데, 다시 읽어보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말한다. 예수를 만나니까 다른 모든 것이 똥처럼 여겨지더라. 내가 정통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프라이드도, 하나님께 대한 내 열심도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다 똥처럼 여겨지더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보면 경제용어가 숨어있다. 여기 <잃어버리고>라는 말과 <얻고>라는 말이다. 일년장사를 하고나서 손해와 수익을 따져본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믿고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장사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말하면 망하는 장사를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은 더 값나가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예수다. 예수를 얻었다.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는 나를 얻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아깝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면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똥이었다고 생각되어지면 똥을 잃어버렸는데 뭐가 아깝겠는가?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이 똥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다. 가장 값비싼 것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다. 여기 <안다>는 말은 <야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고 말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체험이다. 예수를 맛보고 예수를 느끼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의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의 능력을 맛보니까 다른 그 어떤 것도 중요한게 아니었더라 이 고백을 하는 것이다.
기쁨 도둑은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자기 자랑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난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랑거리가 똥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 하신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가 있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NBC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다. 기도하던 책상에는 조그마한 쪽지가 하나있었는데,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그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전세계의 전도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는 특별 찬양을 했다. 찬양이 끝나자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오랫동안 숙연케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2009. 9. 9.

빌2:19-30 우정의 기쁨














故 함 석헌 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예’보다도/‘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인생을 사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많다. 그런데 C. S. 루이스는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우정의 기쁨을 꼽았다.

불가에 둘러앉은 믿음의 친구들만큼 이 세상에 큰 기쁨이 있겠는가? 루이스(c. S. Lewis)

요즈음 사람들은 우정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고대사회에서 우정은 가장 행복한 것이었으며, 모든 종류의 사랑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왕관이었고, 모든 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우정을 무시한다. 우정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갔다. 잔칫상의 메인코스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정을 별로 경험해 보지 않으니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교회생활의 중심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의 우정의 관계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저녁 선선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의 동산에 오셔서 산책을 하셨다. 아마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우정을 나누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 성경에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지칭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단지 하나님과만 우정관계에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도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결혼관계를 포함해서 인간 사이에 우정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계획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우정 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 이 우정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우정의 바라면서도 우정 속에서 상처받는 긴장 속에 살게 되었다. 마치 인간은 고슴도치의 슬픈 사랑을 닳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는 추워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서로의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면 서로를 찔러댄다. 그래서 떨어지면 추운 겨울날의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 누군가 함께 있어줄 이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가까이 가면서 서로의 가슴에 찔리는 상처를 경험하곤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장벽,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엡2;14)을 허무셨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허무셨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을 허무셨다. 우정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우정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결혼만이 고독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정은 또 하나의 해결책이다. 우리 사회는 이성관계, 성적인 관계에 너무나 많은 초점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중요한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면에서 우정은 결혼보다 더 중요하다. 결혼관계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만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우정은 천국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를 좀 더 깊이알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 2:19-30에서 바울의 우정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 디도의 우정관계를 보여준다. 늘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된다. 바울에게는 깊은 우정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4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진실한 사랑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더베 혹은 루스드라출신의 사람으로 바울을 통해서 회심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게였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로이스로 되어있고,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 불렀고, 매우 긴밀한 우정관계를 가졌다.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여행에도 동참했고,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경우도 많았다.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들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종종 디모데를 보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말한다. 바울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자기 일을 구한다고 했다. 뉴욕 전화회사에서 500명의 사람들의 통화내용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500건의 통화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나”(I)라는 단어였다. 3,990회 사용되었다. Gladstone이라는 사람은 “이기심은 인류의 최대저주”라고 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의 일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또 한사람 에바브라디도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병든 것을 진실로 걱정하며, 근심했다고 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낸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해서는 병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바울에게도,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때때로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은 몇 가지 작은 일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다시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 걱정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걱정한다. 26절을 보니까,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우정관계의 첫 번째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친구들이 없다. 자기 필요를 위해서 친구를 사귀려는 사람들은 진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우정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확실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남의 친구가 되는 데 있다 ”고 했다.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2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2달 안에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라.”

그러나 이 말의 원조는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이 황금률이라 부르는 마태복음 7;12을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우정관계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이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전도는 대부분 이런 우정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2. 공통의 관심사.

바울이 이들과 깊이 있는 우정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 때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21절, 새번역)라고 말했다.

보통의 우정관계에서는 서로의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우정이 만들어진다. 연인사이의 애정과 친구사이의 우정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이성간의 애정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친구간의 우정은 함께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골프든 우표수집이든 음악이든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때 우정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우정은 좀 더 다른 차원이 있다. 단지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함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바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기독교의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없이는 우리의 우정이라는 것도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 없는 가정, 그리스도 없는 우정은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종 새롭게 예수 믿는 분들이 말한다. ‘내가 예수 믿은 후에 내가 전에 몇 십 년 알았던 사람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친구들은 그냥 서로 눈만 마주보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고, 무엇보다도 한 방향을 비라 보고 있는 사람들 이다. 그들은 동일한 목표, 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동일한 주인을 섬기고 있다. -c.s.루이스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밀함을 가리킬 때, ‘형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 부른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디모데를 가리켜서도 형제라고 부른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호칭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어떻게 불러주는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는 사실 우리 문화권의 배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를 형제로 불러주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저를 형제라 부르고, 저도 여러분을 형제라 불러주고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문화는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어떤 호칭이 그냥 호칭이 아니라 어떤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호칭은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저는 십대부터 제 모교회의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 주변에는 교제하는 다른 목사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 남서울 교회 홍정길 목사님,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등과 자주 만나시면서 우정을 나누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 곁에 있으면서 제게 아주 신선했던 것들은 서로에 대한 호칭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내놓으라 하는 목사인데,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는 제 가까운 친구목사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들에게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는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냥 ‘집사님’ 아직 직분을 받지 못한 분은 ‘성도님’, 좀 상처받지 않을 분 같다 싶으면 ‘형제님’이라고 부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함께 구원을 체험했다. 함께 같은 하나님을 부른다. 함께 같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 함께 동일한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함께 영원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같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된 이들이다.

3. 같은 비전.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이 친밀해질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2절에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한다. 바울과 함께 하는 동안에 디모데는 2인자의 자리를 기쁘게 감당했다. 바울은 제자라고 해서 디모데 위에 황제처럼 군림하지 않았다. 여기 22절에 [함께 수고했다]는 말은 [함께 종이 되었다]는 말이다. 25절에 에바브라디도에 대해서는 [함께 수고하고]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정이란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수고할 때, 그 가운데 우정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교우들과 친해지고 우정이 깊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왜 관심이 없는가 불평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수고하고 봉사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함께 교제하고 대화나누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우리의 교제가 내향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 끼리만의 교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가 목장교회에서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회봉사의 기회를 찾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밖을 내다보는 창문이 없는 집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가 빛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있어야 한다. 이 창문이 많을 수록 집은 빛이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만 살겠다고 창문을 줄이기 시작하면 집은 금방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제가 뉴질랜드에서 목회했을 때 제가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목사님이 오셔서 저희 교회에서 집회를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모임 후에 이런 저런 선배목회자로서 충고를 해주셨는데, 그 한 가지는 셀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셀 목회는 목회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목회자 중심의 강단 목회를 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충고는 교우들과 거리감을 두라는 것이었다. 교우들과 목욕탕 같은데 절대 같이가지말라고 충고하셨다. 저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충고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저는 셀 목회를 지향한다. 주일교회도 중요시 여기지만, 주중에 셀교회들, 목장교회들을 통해서 교회가 더 건강하게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교우들을 동역자라고 생각하면서 목회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목회를 우정의 길이라 생각한다. 교우들이 단지 목회의 대상자가 아니라, 교우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우정의 목회를 생각한다.

우정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같은 비전이 있어야 한다.

4. 어려운 일을 함께 감당함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자’(25절)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만일 여러분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기독교를 선택했다면 여러분은 잘못 선택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성경은 우리를 군사라고 부른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다.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이 바울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30절 말씀을 보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아프로디테라는 말에서 나왔다. 아프로디테는 로마의 비너스와 같은 신인데, 우리에게는 사랑의 신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도박의 신이기도 했다. 플루타크의 글에 보면 에바브로디도(에파프로디테)는 도박에서 최고액수를 걸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라는 말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했다는 말이, 원래는 자기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다. 가는 도중에 그는 병에 걸렸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까지 갔던 것 같다. 그 와중에서도 에바브로디도는 꼬박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3배정도가 되는 1300KM, 꼬박 6주가 걸리는 험악한 길을 거쳐 로마에까지 갔던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우정을 담아 자기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에 도착해서 바울을 섬겼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우정이 이런 것이었다.

우정의 진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가짜 친구는 떠나가지만, 진짜 친구는 남는다. 예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했다.

우리는 인생 중에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 우정은 그런 어려움의 시기에 함께 있어주면서 서로를 격려해주고 서로를 붙들어줄 때 자라난다. 사람들이 잘될 때,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함께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우정은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너희는 나의 친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밤이 지나기 전에 제자들은 도망가고, 어떤 이는 배신하고, 어떤 이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우정이다. 우정은 위험이 있다. 때로 거절당할 수 있다. 배신당할 수 있다.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상처의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것,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모험일지 모른다. 죄인된 이간끼리의 우정이니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상처받지 않을 안전한 길을 가기보다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정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길은 정확하게 이 길을 따른다. 교회에서 안전한 길은 다른 사람들과 깊이 섞이지 않는 길이다.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상처 안받는다. 이민생활하면서 사람들을 안 만나면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상처받을 위험이 있으면서도 모험하셨다. 우정의 길을 가셨다. 공동체의 길을 가셨다. 신앙의 길은 교회 공동체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재력과 미모가 있었던 포오샤라는 여인에게 많은 청혼자가 몰려든다.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서 3개의 상자를 준비한다. 황금상자, 은으로 된 상자, 납으로 된 상자. 청혼자가 포오샤의 초상화가 담겨있는 상자를 고르면 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

황금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얻게 되리라'라는 문구가 있었다.

은으로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있었다.

납으로 된 상자 위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작품 속에 모로코의 왕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황금상자를 고른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반짝이는 것이 곧 황금은 아니니. 내 바깥 모습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 그 혼을 팔았도다.” 황금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바를 얻는다고 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황금상자처럼 바깥모습만 보고 인생의 결정을 한다는 교훈이며, 거기서 얻는 것은 텅 빈 상자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황금상자 안에 초상화는 없었다.

또 다른 날에 아라곤의 왕자가 와서 청혼하게 되는데, 그는 은상자를 고른다. 이 상자를 고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는 문구가 자기가 이 여인을 얻을 만한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상자를 여니까 바보가 눈을 껌뻑이는 그림이 있고,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바보들의 머리는 나를 선택하지만 나는 저주가 될 뿐이니, 이내 나는 사라지리라”. 거기에도 포오샤의 초상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밧사니오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모험이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있었다.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은 자, 행운은 따르고 선택도 옳으니! 이 행운이 그대에게 찾아온 이상, 이에 만족하고 새것을 찾지 말라. 이것으로 기쁨을 느끼고 이 행운을 지상의 행복으로 느끼면 그대 아가씨 곁으로 가서 입을 맞추고 청혼을 할지어다.” 거기에 초상화가 있었다.

우정의 길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 모험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다. 상처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은 상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우정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우정에 실망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사랑에 실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앞에 상처와 실망을 드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의 우정에 결코 실망을 주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않고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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