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1.

빌2:12-18 불평을 넘어선 신앙











독일의 유명한 작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속에는 후랑케 부인이란 독실한 천주교도가 등장한다. 60세의 이 여자는주교의 반지에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내에선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처럼 웃지않는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꼭 두가지 경우에는 그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바로 돈을 셀때와 3백개의 유리병에 가득 채워놓은 과일 잼들을 셀 때이다. 그 여자의 유일한 기쁨은 매일 아침 지하실로 내려와 믈어가는 과일잼의 병들을 세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과일잼 병을 세고 돌아온 뒤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3백개의 과일잼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301개의 과일잼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웃지 않는 여자, 돈과 과일잼만이 기쁨이 되었던 여자, 그러나 그 기쁨마자도, 오늘은 300개 이오니, 내일은 301개로 허락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여인,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 여인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현재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참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평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2:1-11절까지의 내용이다. 여기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한 이유를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교인들간에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서야할 이유가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한다. 예수는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자리까지 겸손하셨다는 말씀을 나누고, 우리도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고, 교회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마땅히 예수님 처럼 교인들간에 서로간에 겸손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2:1-11의 내용이다.

이 예수님의 겸손을 얘기하고 나서 겸손의 한가지 실천으로 교인들간에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하고 있다.

v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과 시비를 다른 말로 불평이라 할 수 있다.

불평은 우리의 기쁨을 도둑질해가는 주범이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마음 속에 불평이들어오면 우리의 기쁨도 즐거움도 사라지게 된다.

불평은 신앙성장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주범도 사람들의 불평하는 태도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받을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엄청난 감격을 경험했다. 이제 그들 앞에 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원망해서 쓰겠어요? 그런데 뭐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뭐 또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뭐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여러 가지다. 난 특별히 원망하는 얘기 가운데 드라마틱한 얘기가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은.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원망했다. 원망도 여러 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은 이 원망의 죄, 다시 말하면 불평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원망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아직도 불평이요, 원망이요, 이래 원망 저래 원망인가? 아직 당신은 미숙한 거다. 유치한 거이다.

불평하는 사람들의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이들은 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성숙한 사람은 책임지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불평하는 것은 쉽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책임지는 것은 어렵다.

스캇 펙 박사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결혼생활에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교회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하고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자기는 여기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이다. 불평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1970년대 일본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나카 가쿠에이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짧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수상까지 올라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한때 뇌물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력과 부패 스캔들을 극복하고 정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그가 사람들을 대할 때의 당차면서도 자신을 먼저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다나카가 일본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일이다. 초등학교 출신인 그가 장관 자리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고 불평하였다. 게다가 대장성은 당시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대학을 비롯한 명문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많이 있는 집단이이서 그들의 자존심은 대단하였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다나카가 어떻게 최고 대학을 나온 우리들을 지휘할 수 있겠어?"

자신들이야말로 일본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장성 사람들은 그래서 공공연히 다나카가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된 것을 조롱했다.

다나카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불평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직원들의 술렁임 속에 당당히 취임연설을 강행했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듯이 여러분은 일본의 수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정도에 불과한 데다 대장성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러니 대장성 일은 여러분이 열심히 해 주십시오. 저는 뒤에서 여러분의 일에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다나카의 연설이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즘은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

아담과 하와부터 사람들은 책임지기를 싫어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그 과일을 따 먹었느냐? 하자, 아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여자때문입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라고 했던 아담이 정작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저 뱀 때문에 그랳습니다.‘

불평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말로 책임을 지는 신앙이다.

어떤 책임을 말하는가?

1.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v12.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엡 2:8-9, 새번역)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과 가장 비슷한 말은 선물이라는 단어이다. 선물은 돈없이 받는 것이다. 내가 선물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선물을 주면 돈을 치룰 필요가 없다. 선물은 거저 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구원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교회생활 열심히 해도 우리의 열심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했으면, 그 이후에 계속되는 결혼생활에 대해서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을 회개했으면 이제 그리스도인 답게 책임있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가지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성경은 불평을 그칠 것을 말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러 말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비판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무의도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는 삶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나의 트릭을 쓴다. 자기는 새신자라는 것이다. 믿음이 어려서 그런 책임을 질 능력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한지 10년 20년이 되도 여전히 새신자 의식으로 생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요 하는 것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이 말은 구원받았지만, 이 구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축복과 성장과 변화와 능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 그저 부끄러운 구원상태에서 머무르게 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능력을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맛보기를 원하신다.

CS 루이스는 멋있는 휴양지에서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가 예수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체험한 그 구원의 감격을 진정 모르기 때문에 평생 진흙탕에서 지내가 세상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것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소원을 주신다. 때로는 성경을 읽고 싶은 소원, 기도하고 싶은 소원, 교회를 섬기고 싶은 소원...이런 소원들이 생길 때 이것을 무시하지 말라. 소멸하지 말라.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관심을 보여주고 싶은 소원이 생겼으면 전화를 걸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은 소원이 있으면 기도해주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구원의 깊은 경지에 까지 도달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의 소원을 주신다.

우리가 불평의 습관을 끊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멋있는 인격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술이 진흙탕을 뒹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멋있는 휴양지에 머무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겸손이 묻어나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서 책임지는 태도이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마땅히 예수 안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우리 행동에 책임을 지고, 우리 입술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불평을 그쳐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15절에 나와있는대로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기를 ” 원하신다. 세상사람들과는 구별되고, 세상 사람들과 남다르고 세상 사람들보다는 빛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남다르게 살 책임이 있다. 똑같이 욕하고, 똑같이 불평하고 똑같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보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오히려 자기 주장을 굽힐줄 알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할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 이것이 거룩이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책임, 구별되게 살아야할 책임, 남들과 달라야할 책임이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뒤틀려있고, 꼬여있고,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고 거스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말을 곡해하고, 사람의 인격을 의심하고, 나쁜 상상을 하고,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성경은 이 세상은 사탄의 활동지라고 말한다. 사탄은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라 한다. 사탄은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들 마음 속에, 머리 속에 거짓을 심어준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순진한 환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교회는 도대체 어떻게 달라야할까? 하나님은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세상사람들에게 여기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겸손하게 살고, 섬기며 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낮추며 자신을 죽여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빛이 되고 있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 사이에 불편한 일이 생겼다. 이 둘은 모두 목축업자들이었는데, 양떼, 소떼가 많아지자 같은 목초지를 놓고 아브라함의 일꾼들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의 주목을 끄는 것은 창세기 13:7이다.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성경은 이 다툼의 현장에 이방 민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롯의 일꾼들이 서로 다투는 것들을 이방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툴 때, 교회가 서로 다툴 때, 누가 보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책임이 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다. 다르게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이 어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라 하셨다. 소금은 소금의 맛이 있어야 하고, 설탕은 설탕의 맛이 있어야 하는데, 모양은 소금인데 전혀 소금기가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소금이 설탕맛이 나면 안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맛을 내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3.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세 번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밝히 드러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한다.

v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립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어떤 태도로 가르쳤는가?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 말씀을 쉬운성경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삶을 믿음과 봉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사람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배운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

이들은 16절의 표현대로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것은 우리가 성경말씀을 배웠으면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배웠다하는 우리들이 맘대로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할까요?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이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었다는 것을 믿을까요? 이 말씀은 오늘도 진리고 오늘도 내게 생명이고, 오늘도 내게 길이라는 것을 믿어줄까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서로 겸손하게 섬기라는 말씀을 배웠다면 이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권위를 드러낼 책임이 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한다.

여러분은 이 성경말씀을 믿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았는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는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죄사함받은 적이 있는가? 정녕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의 말씀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밝힐 책임이 있다.

이 성경말씀이 모든 원망과 시비를 그치라고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성경말씀 앞에 진지하게 서야한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인 것이다.

실제적인 제안

가. 불평하는 태도가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을 인정하라

나. 내가 져야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잠 19:3, 새번역)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

다.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 처한 상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하라.

마.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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