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9:28-40 We are donkeys
우리들에게 소나 말에 비하면 당나귀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어릴 적 옛날 이야기나 이솝 우화에서 당나귀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당나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타고갔던 당나귀이다. 본문에 나오는 당나귀는 어른 당나귀가 아니라 새끼 당나귀, 영어로 colt라고 하는 당나귀이다.
성경은 이 어린 당나귀가 감람산 근처의 어느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당나귀는 감람산 너무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감람산 너머에 예루살렘이 있었다.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도시의 중심은 성전이었다. 이곳은 인류의 중심지였다.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영향력의 중심지였다. 이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메시아에 대해서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의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우고 역사, 문화, 종교, 영향력의 중심지로 나아갔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자리까지 나아갔다. 이 어린 당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간 곳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 되었다. 세상 변화의 샘터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변화되는 현장이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어린 당나귀에게 얼마나 놀라운 날인가?
이 어린 당나귀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에 이렇게 쓰임받을 수 있었을까? 30절을 쉬운번역으로 읽어보자.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당나귀는 사람들이 타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나귀는 그동안 한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새끼였다. 예수님이 이 어린 당나귀를 타고 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어린 당나귀가 말해주는 바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그 도구로서 이런 어린 당나귀같은 것들을 사용하신다. 아직 너무 어려서 사람들을 태우기에 적당치 않다고 여겨지는 당나귀, 아직은 준비가 안되었다고 여겨지는 당나귀들을 사용하신다. 세상에서 닳고 닳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 경험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은 어리다고 여겨지고, 부족해 보이고, 아직은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 당나귀는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그런 방법으로도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 어린 당나귀처럼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쓰신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늘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쓰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교회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 다른 교회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가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 “다른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판박이처럼 똑같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타보지 못한 당나귀, 예상하지 못한 당나귀를 사용하셨듯이 교회를 늘 새롭게 사용하신다. 어떤 교회는 찬양사역을 통해서 쓰임받을 수 있고, 어떤 교회는 한글학교를 통해서 쓰임받을 수가 있고, 어떤 교회는 교우들을 잘 돌보는 것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나름대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비전과 사명이 다르고, 교회의 리더십 체제가 다르고, 목회의 초점이 다를 수 있다.
일반 기업들을 생각해보라. 삼성기업이 현대나 대우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기업들마다 자기들의 방식이 있고, 품목이 있고, 전략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모두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방법에 매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써오는 방법이 아니면 새로운 것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얼마든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들이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주시는 아이디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 앞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 어린 당나귀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타보지 못한 당나귀였다. 사람들이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이 당나귀는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당나귀는 또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눅 19:30, 쉬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리 끌고 오너라.』
이 나귀는 그냥 마을 한쪽에 매여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구도 이 어린 당나귀를 눈여겨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새로운 어디를 찾아가려면 긴장한다. 네비게이션을 키고 일러준대로 왼쪽, 오른쪽, 직진... 골목 골목가다가 때대로 GPS가 인도한 곳이 엉뚱한 곳일 수도 있다. 이 당나귀는 그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 있지 않았다. 그냥 흔히 볼수 있는 그런데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 사람들이 특별하게 보지도 않고 눈여겨 보지도 않는 그런 것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그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것들, 이 상황들, 이 사람들, 이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재능도 사용하실 수 있고,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 마치 그 어린 당나귀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라. 이 당나귀는 예수님이 앉으신 이동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이 당나귀는 풀여야 했다.
묶여있던 당나귀는 풀려야했다. 묶여있는 당나귀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나귀를 풀어라”. “그리고 내게로 데려오라”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삶 속에 있다. 그저 풀기만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을 묶어놓은 것은 없는가? 누군가 교회를 잠자는 거인이라 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이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의 성도들 안에 있는데, 그 잠재력들이 잠자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귀를 풀라.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나귀를 풀지않으면 안된다. 여러분의 걱정 때문에 묶여있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묶여있고, 아직은 때가 안됐다.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고 묶여있지는 않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 어린 당나귀도 준비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타본 당나귀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리다고 생각하는 당나귀였다. 나귀를 풀줄 아는 세대가 되자.
주님께서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로 데려오라”
주님께서는 33-34절에 이렇게 말한다.
(눅 19:33-34, 공동) [33]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34]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세상에는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나귀들이 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한다.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을 쓰시고 싶어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이 사용하신다고 했을 때, 세상은 이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음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비즈니스가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저널리즘이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다. 정치도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들을 쓰시겠다고 한다면,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윌버 포스
혹시 “Amazing Grac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세기 영국의 하원 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그는 노예무역에 대항해서 강력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서너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운동에 함께 참여하며 서로에게 헌신했고 그 거대한 악을 바로잡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이들은 런던 외곽에 있는 클래펌 지역에서 모여 살아 나중에는 클래펌파 (Clapham Sect)로 알려졌다. 20년 동안 이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전쟁을 치르듯 싸웠다. 어떤 해에 의회가 투표를 통해서 이들의 제안을 폐기해 버리면 바로 다음 해에 또 제안했다. 득표수가 적어 다음번 투표 때까지 2년 동안 일을 진행시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노예제도는 대영제국에서 매우 이윤이 큰 사업이었다. 리버풀에서 출발하는 500척의 배가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로 또 거기에서 미대륙으로 다니면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장사를 했다. 노예무역상이 벌어들인 수천 파운드의 돈 중에서 상당 부분은 하원 의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만나서 3시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했으며, 영국 전역에 소책자와 안내지를 배포했다. 또 하원에서 몇날 며칠을 서서 정의를 외쳤다. 드디어 1807년, 20년 동안의 싸움 끝에 노예무역이 의회의 투표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1833년 윌버포스가 임종을 맞이할 무렵에는 노예제 자체가 대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되었다. 윌버 포스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하나님이 이것은 내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영역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정치도 하나님의 것이다. 골퍼로서 하나님님께 영광돌릴 수도 있고, 회사 경영자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고, 우리의 음악으로, 영화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정치인이 되라. 음악가가 되라. 영화PD가 되라. 이것들을 예수님이 사용하시고, 예수님이 타고가시는 어린 당나귀가 되게 하라. 사업을 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경제윤리를 생각하며 본이 되는 사업가가 되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귀에 태워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태우기만 한다면,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업, 정치가 예수님의 어린 당나귀가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어린 당나귀를 쓰시는데 미안해하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쓰게 돼서 미안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은 교만하거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날 그 당나귀를 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이시다. 그러나 무례한 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재능과 재주를 쓰신다면, 여러분의 삶을 사로잡으신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쓰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이 나귀에 타고 계신지만 확인하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은 절대 사과하지 않으셨다.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행진하시자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온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열정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기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하셨는지 아시는가? “저들이 나를 경배하지 않으면 돌들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 물러서거나 걱정하지 말라. 찬양과 경배에는 어떤 힘이 있다. 나귀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 누가 찬양을 인도하고, 누가 노래를 부르고 누가 악기를 연주하는가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찬송가를 부르느냐 복음송을 부르느냐, 악기를 사용하느냐 안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어린 나귀들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 임재하시고, 여기 함께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나귀에 대해서 너무 매혹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 열정있는 교회가 되자. 이점에 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세상에 대해서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자.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과해야한다고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기 때문이다. 나귀에 앉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나귀에 앉으신 주님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귀에 앉히셨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미안해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으셨다. 당시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었다. 이 성전을 나의 집이라 부르셨다.
(눅 19:45-46, 새번역) [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집은...’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내 집이라고 부르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심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당신의 성전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구약성경에서는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다. 지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예수님이 당나귀 위에 앉으신 것에 대해서 사과하실 것 같은 상황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사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강하고 담대해야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나귀에 앉으시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셨다. 그의 열정, 그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말이다.
(눅 20:1, 새번역)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실 때에....
물론 예수님이 복음이시다. 예수님은 복음과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셨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그분은 물러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기회가 있다. 주님께 영광돌리고 경배할 기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지으시겠다고 하신 것을 지을 기회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할 기회가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씨를 뿌리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에 두셨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가지시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사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강하게 서시라. 예수님 안에서 신자로서 강하게 살라. 오늘은 물러설 날이 있다. 오늘은 앞으로나아가는 날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사용하실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여러분의 당나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당나귀 위에 예수님이 타시면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상상도 못할 것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노력이나 무엇이든지 그것을 당나귀로 보라. 나귀에 너무 현혹되지 말라.
예수님을 태우고 감람산을 내려오는 당나귀를 생각해 보라. 당나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일꾼이며 이동수단일 뿐이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찬양하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 앞에 깔았다. 나귀가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선하 아이디어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교회일 수 있고, 목장교회일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의 재능과 재주일 수 있다. 그러나 당나귀에 현혹되지는 말라. 절대로 그것이 주인공이라고 우쭐거리지 말고 혼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교회는 빌딩,프로그램, 조직, 설교, 사람들, 재정... 그러나 이것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나귀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나귀 위에 계실 때에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