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6-9 샬롬의 길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샬롬이란 뜻은 평화란 뜻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호주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바에 비하여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지만, 그 나라의 역사는 꽤 길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이 약 BC 2500년경의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5000년쯤 되는 셈이다. 그 긴 역사에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했다. 모세의 영도하에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면서 부터 이들은 전쟁을 겪어야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과 전쟁을 일으켰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했다. 가까이는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족속들과 늘 싸워야했고, 주변의 강대국인 아람제국, 앗시리아제국, 바벨론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제국, 로마 제국 등의 침략을 차례대로 겪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전체 땅은 우리 나라 강원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작은 나라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단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평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 마다 ‘샬롬’이라고 인사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뜻이다.
한국도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 한국은 이제까지 약 900번 정도의 외침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사말도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인데, 안녕이란 말은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요, 히브리어로 바꾸자면 샬롬이란 말이다.
오늘 성경은 평화를 말한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평강이란 한자어는 다른 말로 평화란 말이다
9절에서도 평화란 말이 나온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 말하고, 9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쓰이는 이 평화란 말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깊은 뜻이 있다. 바울사도도 편지할 때마다, 인사말로 두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바로 은혜와 평화란 말이다. 그는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말이 은혜란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다. 우리는 우리가 업적이 많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편지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평화란 말도 은혜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왜 바울은 평화를 그렇게 중요시여겼을까?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평화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아니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평화를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샬롬의 길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인류가 범죄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졌다. 인간의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평화스러운 관계를 깨뜨려버렸다. 우리 모두는 다 범죄하였고, 우리의 죄로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죄가 있는 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하는 공의로운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거룩함도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니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은 인간 대신에 자기 아들을 심판하시기까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인간은 범죄했다. 평화는 깨졌다.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낼 만큼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는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인 이리안자야에는 식인종이라고 알려진 사위 족속 부락을 전도한 선교사이다. 자신의 선교경험을 ‘화해의 아이’란 제목으로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선교하려는 사위부족은 워낙 싸움을 즐기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족속이라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배반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보다 가룟 유다를 더 받아들이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선교사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전통의식을 바라보다가 아주 멋진 영감을 하나 얻었다. 이들에게는 두 부족이 싸우다가 한 부족이 지면 진 부족의 추장이 자기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치름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선교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생각해 냈고 그 의식이 행해질 때 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평화의 아이를 주셨으니 이는 아이가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 평화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로마서 5:10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적군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화해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의미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하나님과 등돌리고 살던 모습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의 첫번째 뜻이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에 대해서 말한다. 오늘 성경본문 7절이 바로 그 말씀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이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바이다. 이구절 앞에 6절을 보면 우리가 이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염려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은 늘 염려할 거리들이 많다. 요즘에는 숱한 보험이 있다. 보험의 종류만 해도 수백가지가 넘을 것이다. 건강에 대해서도 염려할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의 큰 염려거리가 아닐 수 없고, 젊은 형제 자매들은 특히 미래의 삶에 대해서 큰 불안과 염려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민사회는 더 불안하다. 수시로 변하는 이민정책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솔직히 너무나 많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 눈앞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울고싶은 상황인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는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기도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것이 막혀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기도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기도대신에 염려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까 염려가 우리 삶의 습관이 되었다.
Walter Cavert란 분이 염려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44%의 염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염려이다.
30%의 염려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12%의 염려는 건강에 대한 쓸데없는 염려이다.
10%의 염려는 아주 사소한 것들,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한 지나친 염려들이다.
오직 8%만이 염려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염려하는 경우라 했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얼굴 속에는 늘 근심이 있다. A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웃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 B를 가지고 염려하기 시작한다. B가 해결되면 이 사람이 행복해할 것 같은데 곧바로 C를 가지고 염려한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한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평화를 주신다. 괴로운 상황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주신다. 울고 싶은 환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 평화를 맛보셨습니까? 이 평화를 누리십니까?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이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중세기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봉쇄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아마 밤새 산에 오른 것 같아 문을 열어 주면서 묻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그가 바로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명한 명작인 신곡(Divine Comedy, La Divina Commedia)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신곡을 꼭 단테가 인간 사후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신곡에서 그가 여행한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의 체험은 바로 여기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삶 그 자체의 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마다의 길에서도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지옥인가요, 연옥인가요, 낙원인가요? 물론 저는 연옥이라는 사후 세계는 비성경적이라고 믿지만 오늘의 우리의 지금의 영적 상태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인 상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그가 인생의 전반전에 경험한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 평화를 찾아 헤맨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두 가지 상처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아홉 살 난 소년의 영혼의 창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지나간 소녀 베아트리체, 그녀는 9년 후 한번더 그의 곁을 스치면서 그의 가슴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지만 그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나가 그의 가슴에 이룰 수 없는 비련의 상처를 남깁니다. 단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그의 아름다운 고향 ‘꽃의 도시 피렌체’가 정쟁의 도시가 되면서 그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귀향의 꿈을 그리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 비평가는 이런 사랑의 상처와 고향의 상처가 단테로 하여금 영원한 순례자가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방랑자 단테는 마침내 그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해 그이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친 신곡의 드라마 그 영혼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된 다음해(1321년,56세 되던 해) 그는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인도한 주님의 품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발견하고 눈을 감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그의 영원한 사랑을 만난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모든 것 속에 있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안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순례자 단테는 정욕의 추구로도 도덕으로도 정치로도 찾지 못한 그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마침내 그리스도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어도 비극의 주인공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거룩한 희극’(Divine 'Comedy'-tragedy의 반대라는 의미로)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천국이 그의 영혼에 임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체험한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영혼의 평화가 있는가?
셋째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길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더 한걸움 나가서 이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이 평화를 곳곳에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대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이 가면 그곳이 더 평화스러워집니까? 아니면 더 시끄러워집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 구절은 두가지로 표현한다.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졌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예수 믿어 변화되었지만,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옛 성품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혈기 때문에, 우리의 질투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시기 때문에 내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이 고통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시험에 들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기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한계가 있다.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예수님과 함께 간다면, 평강의 하나님가ㅗ 함께 간다면 그곳은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면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으로만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면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길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다.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쉬운 공식을 주지 않는다. 내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 8-9절 말씀을 읽어보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화평케 하는 길은 내가 먼저 주님과 동행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든지.
평화의 기도/聖프란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샬롬의 길은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