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12.

막15 16-20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예수-09.6.7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력하게 나타난다.
  • 끌고
  • 입히고
  • 씌우고
  • 벗기고
  • 끌고가고
  • 군병들은 예수를
  • 때리고
  • 침뱉고
  • 절하며 조롱하고...
우리가 예상하는 예수는 이런 예수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능력의 예수를 원한다.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능력을 보여주는 예수를 원한다. 성경에서 기적과 신유를 베푸시던 예수를 원한다.
  • 오병이어의 기적
  •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
  • 바다를 잠잠케 하는 기적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던 기적의 주...
우리는 그런 예수를 성경에서 보고, 그런 예수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군병들 앞에 아무 힘없이 서있던 무력한 예수를 만나게 된다.
  • 우리의 고난과 눈물에 침묵하시고
  • 우리의 오랜 기도에도 응답은 없어 보이고
  • 우리의 가정에 일어난 비극을 막아주지도 못하셨고
  • 내가 받은 상처도 막어주지 못한 예수
이런 예수를 만나며 우리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에게 문제를 찾아본다.
  •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예수의 양면성이 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오셨지만,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베푸셨던 능력의 주이지만, 또 한편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한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네가 인류의 구원자라고 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고...
사람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지로 도탄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전사 같은 예수를 원했다. 초라하게 나귀타고 오는 예수가 아니라 왕의 백마를 타고 원수들을 제압하는 예수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는 너무 초라했고, 너무 무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등을 돌렸다.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간 예수가 어떻게 구원자일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십자가를 받드는 무리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고 묘사했다. 아무 쓸데없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버린 예수....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예수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버려버린다. 신앙을 버린다. 교회를 떠나지 않지만, 더 이상 예수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 예수는 “연한 순” 같을 것이라 예언했다.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은 연약한 메시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지점이다. 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살아계신 분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무력하게 나타나는가? 왜 예수는 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분은 내가 고통당하는 이 현실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C.S. 루이스는 아내를 잃어버린 후에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책, “헤아려본 슬픔”이란 책에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이 사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다. 진짜 위험은 하나님에 대해 몹시 불쾌한 것들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결론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아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재는 이렇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만 시험받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시험받았던 내용이었다. 마귀는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네 능력을 보여봐라. “돌을 떡이 되게 해보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보고, 이 세상 천하왕국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봐라”고 유혹했다. 분명 그는 돌이 떡이 되게 할 수 있었고,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고,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것이 시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시험을 거부한다. 마치 아무 힘도 없는 자처럼, 돌이 떡이 되게하는 대신 배고픔을 참으셨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고,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는 무력함을 선택하셨다. 로마의 병정들 앞에서 무력하게 서있었던 예수,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 아무런 응답이 없는 예수, 그저 힘없는 자처럼 서 있는 예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지만, 이것은 예수가 선택한 길이다.
왜 능력의 예수가 이 연약함의 길을 선택하셨을까? 그분은 왜 로마 병정들에게 당하셔야만 했고, 왜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고, 왜 예수는 힘없는 모습으로 사셨던 것일까? 왜 예수는 우리들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문제에 속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는 것일까? 왜 예수는 무력한 것처럼, 연약한 것처럼,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침묵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계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가지 이유는 그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란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저 멀리서 인간이 구할 때 능력을 베풀어주는 예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들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힘없는 모습으로 떨어야 하는 우리들과 같은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셨다.
  • 우리의 고난
  • 우리의 눈물
  • 죄인된 인간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는 우리들...
  • 작은 것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우리들...
  • 죽고 싶을 정도로 고민스러운 우리들
예수는 그런 우리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계시를 원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연약함을 몸소 경험하지 않은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때때로 그분이 속시원한 대답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는 바로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끌어안고 우리와 함께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인류 역사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던 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히 소수의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위젤(E, Wiesel)은 그의 저서 "밤" 가운데서 자기가 본 생생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담아 놓았다. 그 비극적인 얘기의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치스 친위대는 두 사람의 파리한 유대인과 청년 한 사람을,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두 사람은 곧 죽었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과의 싸움은 반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있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도대체 그분은 어디 있는가?"라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청년이 아직 밧줄에 매달려서 고난 당하고 있을 때 내 뒤의 그 사나이가 또 부르짖는 것을 들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거지?" 그리고 나는 하나의 소리가 내 속에서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다니? 바로 그 분은 여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고통당할 때, 말없이 같은 고통으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눈물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죽고싶은 고민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받은 가슴에, 상처입은 치유자로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이분을 믿으라.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가 되기원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없는 인생을 구한다. 모든 것이 손쉽게 해결되기 원하신다. 사람들은 상처없는 세상을 구한다. 이때 사람들이 바라보는 예수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우리가 원하는 것마다 주시는 예수이다. 필요할 때마다 능력과 기적과 신유를 베푸는 예수이다. 답답한 우리의 현실에 속시원히 대답해주는 예수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의 3가지 시험을 얘기하면서 돌이 떡이 되게하는 대신에,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대신에, 천하만국의 영광을 누리는 대신에 힘없이 배고파하고, 쉽게 상처받고, 연약한 모습의 예수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도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일지 모르나 예수는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도자였다. 세상의 힘은 강력함이요, 숫자요, 거대함이요, 다수이다. 그러나 예수는 연약함으로, 무력함으로, 소수의 사람들로 시작해서, 겨자씨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연약한 리더십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리더십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십이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예수가 이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성장시키기 원하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한계에 부딛혀야 깨진다. 절망에 도달해야 인간의 교만을 부순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야 인간의 고정관념을 부순다.
진정한 리더십은 우리를 연약함에 이끌고 가는 리더십이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배운다. 중년기의 갱년기를 경험하면서 도리어 이 세상도, 가정도 진정한 희망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만이 소망의 낙원인 것을 믿게 된다. 우리의 자아가 깨질 때 우리는 성장한다. 세상에서 절망을 느낄 때, 비로소 인간은 천국에 소망을 두게 된다.
사람들은 좀처럼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C.S.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어리 세상을 향해 외치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 했다. 잠잠히 말하면 사람들이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메가폰을 들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그 메가폰이 우리의 고통이요, 힘든 상황이요, 우리의 눈물이요, 우리의 죽고싶은 고민거리이다. 이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우리를 성장시킨다. 하나님을 보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한다. 그래서 때때로 예수는 힘없는 자 처럼, 무력한 자처럼, 침묵하시는 자처럼 우리 곁에 게신다.
다음은 헨리 나우웬이 '긍휼'이란 책에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어떤 곳에 ‘바보들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한 복판 밀밭에는 수박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수박들을 괴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도 그 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정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미련한 사람들아 나를 보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밀밭으로 돌진하여 수박을 쪼개 먹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저 괴물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자가 우리까지 살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건초 갈퀴를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러나 또 한 여행자가 이 마을에 들어서 이런 마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그는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설득하고 가르쳐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 수박을 먹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넓은 뜻이 있다. 천국은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다. 로마서 14:17에서 천국은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 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사람들은 의와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고난과 고생과 슬픔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지옥같은 인생도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임하십니까?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가 천국을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하는 자가 천국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넘어져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존재,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천국은 그렇게 우리에게 임한다.
군병들에게 힘없이 당하고만 있는 예수, 우리는 이런 예수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무력함,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땅에서 천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원리로 천국을 세워나가십니다.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땅에 천국을 세워나갑니다. 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보다는 사람들이 진정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군전쟁의 병사들처럼 무력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기독교인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이 죽음으로서, 자기가 희생당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갑니다. 우리가 교민 사회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일까요? 우리 교회가 재정이 튼튼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교민 사회가운데 심는 것일까요?
아니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밀알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희생하고 섬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섬김받는 제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군병들 앞에서 무력한 예수님,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연약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동참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 우리가 깨어지고 부서줘 진정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성장시키는 인도자가 되시고, 그 연약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나라를 세워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분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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