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신앙생활을 위해 드리는 시간이 낭비처럼 여겨진 적은 없습니까? 사실 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교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됩니다. 주일마다 시간을 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중에 있는 소그룹 목장교회 모임, 청년들은 청년부 모임, 그리고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더 열심있는 분들은 새벽기도, 또 제자훈련을 받는 분들은 또 한번의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를 하게 됩니다.
● 만일 이런 시간을 다른 곳에 사용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발전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시간만 할애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은 금전적으로도 교회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수입의 1/10을 헌금할 뿐 아니라, 시시때때로 감사헌금과 주일헌금,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교회에 헌금하게 됩니다. 차라리 이 돈을 교회에 헌금하기 보다는 보다 뜻깊은 곳에 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 솔직히 때때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혹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드리는 시간이나 돈이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와 똑같이 느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어떤 사람들입니다.
● 본문의 배경은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벌어졌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14장과 요한복음 12장은 같은 사건을 두고 약간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데, 종합해보자면 이렇습니다.
● 베다니라는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로서 아마도 예수님은 유월절이나 유대인의 명절에 베다니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곤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마을에는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친구”라고 불리던 사람인 것을 보아 주로 이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두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하나의 이름은 마르다고, 다른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르다는 봉사를 잘했고, 마리아는 말씀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 마을에는 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병환자”라는 수식어구가 붙어있습니다. 원래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살수가 없었는데, 마을에 살고 있는 것으로보아 예전에 나병환자였다가 지금은 고침을 받은 것 같습니다.
●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나사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열었다고 했는데, 이때 사용했던 장소가 베다니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고 식사가 되어지고있는 상황에서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와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습니다. 요한복음12장에 의하면 이 여인은 마리아였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의 가치, 즉 거의 1년을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매우 값비싼 향유였는데, 그것을 몽땅 예수님을 위해서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낭비처럼 여겨졌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 사람들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몽땅 부어버린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화”가 났고, 이 여인의 행동을 “책망”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낭비”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다른 말로 <낭비>하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저는 똑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 너무 열심히 다니면, 부모들은 자녀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봅니다. 그래서 한국같은 경우, 자녀들이 대학입학을 앞두면 학생부 예배같은 곳에는 보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장로님, 집사님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교회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내는 는 것은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람이 교회에 아주 큰 돈을 헌금했다고 하면 주변 가족들은 화가 납니다. 차라리 그 돈을 교회에 바치지 말고 사회에 어려운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을 돕는데 쓰는 것이 낫지 않느냐? 그래서 교회나 선교사업에 큰 돈을 헌금하신 분들을 나무라는 경우들도 보았습니다. 이런 행동의 밑바탕에는 교회를 위해서 바치는 헌금은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이뿐 이겠습니까? 미래를 준비해야할 청년들이 교회에 모여앉아 찬양이나 하고 교회모임을 한답시고 서로 먹으러 다니고 하는 모습을 보면 이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다 이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청년들은 지금 교회에 있을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위해서 젊은이들이 교회에 쓰는 시간이 낭비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신앙생활을 위해 쓰는 시간이나 돈이 정말 낭비일까요? 아주 실용적인 계산을 하는 사람들은 낭비라고 여전히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실용적으로 계산할 수 없지만, 실용적인 것보다는 더 가치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모두 써버렸다? 이것은 실용적인 사람에게는 낭비입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각이 다릅니다.
● 낭비처럼 여겨지는 이 여인의 행동이 사실은 엄청나게 값진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낭비>라고 비난했던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9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이 여인의 행동은 책망받을 행동이 아니라, 기억되어야할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낭비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낭비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영웅적인 행동이요, 값진 행동이요, 기억되어야할 행동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실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은 실용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실용적인 가치로는 이 여인의 행동은 <낭비>라골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실용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가치,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절....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이 세상에는 참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인생을 살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일 것입니다.
● 히말라야 도서관 이야기.
●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중요한 일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어떤 중요한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사람들은 그분을 인류의 스승이라 말합니다.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따라야할 모범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 성경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부터 있는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분이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 헬라어로 <로고스>락 불리는 이 분은 누구일까요? 14절을 보겠습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분이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그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요,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죽음까지도 그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
● 이분을 어찌 가난한 자들과 비교하겠습니까? 이 분을 어찌 세상의 다른 것들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분을 어찌 실용적인 금전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정말 우리의 창조자이시라면, 정말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면, 정말 그분이 심판의 주님이시라면, 정말 그분이 부활의 주님이시라면, 어찌 그분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헌신, 우리의 헌금이 낭비이겠습니까?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 사람들은 이 여인이 깨뜨렸던 옥합의 가치만을 생각했습니다.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금방 계산해 내었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여인의 마음 속에 있었던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여인의 오빠 나사로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감사해하는 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부족해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었습니다. 사랑입니다.
● 사랑은 보통 계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슨 실용적 가치가 있느냐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돈보다 소중한 것이고, 우리가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 오늘 사건과 아주 유사하면서도 다른 사건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예수님이 한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으셨습니다. 본문의 시몬과 누가복음 7장의 시몬은 동명이인입니다. 거기서도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도 예수님께 향유를 붓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만 <죄인>이라고 지칭되는 것으로 보아, 전직 창녀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통적인 유대인 바리새인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손가라질하는 이 창녀출신의 여인이 들어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씻어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누가복음 7장의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해석합니다만,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매우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일 제가 어느 식사자리에 초대받아 갔는데, 콜걸 출신의 어느 여인이 제게 이런 일을 한다면 제 입장이 매우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금방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저 목사님이 저 여인의 고객이 아닐까? 실제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예수가 진짜 메시아라면 이 여인이 어떤 죄인인지 알았을텐데....>.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눅7:41-47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자신이 죄가 많아, 용서받을 것이 많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용서받을 죄가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그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우리의 시간, 분명 낭비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돈, 낭비일지 모릅니다. 차라리 보다 의미있는 곳에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그렇게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의 사랑을 읽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죄용서해주시고, 우리에게 은헤를 베풀어주시는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해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을 그분은 읽으십니다.
셋째, 복음에 대한 우리의 헌신입니다.
●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인의 행동은 칭찬받고 기억되어야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자가 행한 일은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듯이 그렇게 헌신하고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한 복음전파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는 희생없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도 이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시지 않았습니까?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에게 구원이 복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평화의 복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치유의 복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찔리셨습니다.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사함받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인의 행동이 기억될 것입니다. 자기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듯이 사람들이 낭비라고 비난하지만, 주님께 자기의 시간, 자기의 돈, 자기의 인생을 기꺼이 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 복음은 전파될 것입니다.
● 여러분, 복음전파를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낭비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가 전파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 이 여인의 깨어진 옥합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위대한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깨뜨리는 옥합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 토마스 선교사
27세에 선교의 꿈을 안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로머트 토마스 선교사는중국에 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아내를 잃은 슬픔이 채가시기도전에 한가지 소식을 접했는데, 중국의 한쪽에 붙은 조선이라는 나라 백성들은 복음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몇마디 조선말을 배운뒤에 기회를 보던 차에 조선으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어 한문 성경을 많이 지니고 서해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며,한국어도 배우면서 전도를 하였다. 그때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피면서 특히 카톨릭신자들을 잡아죽이던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야소"소리만 내어도 세상구경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얼마후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재차 조선 본토로 들어갈 것을 기대하던 중에 미국 상선 제너랄 셔만호가 조선에 상업차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의 통역겸 안내로 동승하게 되어 1866년 7월에 출항하였다.
셔만호는 약 일주일 후 대동강변에 이르러 내지로 항진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는 조선 관군들에 의해 배는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배는 불 길에 싸여 토마스 선교사도물로 뛰어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자 성경 몇권을 가슴에 품고 헤엄쳐 나왔으나, 관군들에게 끌려와 대동강변 모래사장에 오게 되었습니다. 나졸들은 몽치와 창검을 들고 토마스 선교사 앞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님은 창검대신에 복음의 창검인 성경책을 양손에 들고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것을 다가지라"고 나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나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줄만 알았습니다. 나졸들은 노한 낯빛으로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태약자약한 모습으로 성경을 손에 들고 '야소' '야소'하고 권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나졸 박춘권을 비롯한 사람들의 칼에 의해 목이 베어지게 되는데,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때는 186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야소" "야소" 외치며 성경을 읽어보라고 그의 목을 치던 병졸 박춘권에게 성경을 마지막으로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안주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의 래널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공헌하였다.
또 박영식이라는 나졸은 성경을 가져다가 자기 집에 벽지로 발랐습니다. 나중에 이사람도 예수를 믿고, 자기 집을 오픈해서 예배 처소로 쓰면서 벽지성경으로 교인들과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
또 한국교회의 최초의 목사가 된 서경조목사님은 어린시절 평양에 놀러왔다가 토마스 선교사의 처형장면을 보고 밤에 김승직이라는 아이와 함께 대동강변에 버려진 성경책을 가져와서 읽게 되었는데, 그는 목사가 되었고, 김승직이라는 사람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의 주민들은 예수를 믿어 평양은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