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빌1:1 희락의 복음



빌립보서 1:1 희락의 복음

“예수 믿는 신자”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물어 보면 낙태금지를 외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사람들이 즐기는 술담배를 반대하고 세상에서 융통성없이 살아가는 사람, 세상 사는 재미는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교회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 교회들이 하나되기는 커녕 서로 다투고 싸우고 그러다가 교회가 분열되는 꼴을 보여주는 사람들, 때로는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예의도 없이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심지어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필립 얀시의 책 속에, “헤럴드 형”이란 대목이 있어 읽어본다.

“나는 첫돌 지나 한 달 후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 없이 자랐다. 친절하게도 우리 교회의 어떤 남자가 형과 나를 잘 보살펴 주었다. 우리는 그를 해럴드 형이라 불렀다. 철없던 어린 시절 우리는 교회 사람들이 그를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결국 해럴드 형은 우리 교회를 떠났다. 교회의 분위기가 너무 자유 분방하다는 것이었다. 해럴드 형은 도덕과 정치에 강박 관념이 있었다. 미국도 개방 풍조 때문에 머잖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한다고 믿었다. 그는 흑인을 미워했다. 걸핏하면 흑인은 멍청하고 게으르다면서 주변에서 일하는 변변치 못한 흑인들 이야기를 했다. 당시 국회는 민권법 통과에 착수 중이었고 애틀랜타도 흑백 통합을 막 시작한 터였다.

어느 날 해럴드 형은 남아공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그는 남아공 정부에 종교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여당은 개혁 교회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고 그 대가로 교회는 흑인 차별의 신학적 기반을제공하고 있었다. 해럴드 형은 꾸준히 편지를 보내 왔다. 어느 작은 교회의 평신도 설교자가 된 그는 남아공에서 잘 사는 듯했다. 그의 편지를 한 통만 읽어보면 누구라도 그를 괴짜 취급했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편지에 암울한 기운이 돌았다. 그 때는 남아공에서 흑백이 권력을 공유할 수 있다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때였다.1993년 나는 불안한 마음에 해럴드 형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25년 동안 난 그로부터 오직 비판과 반대의말만 들어 왔었다. 내가 쓴 책들에 대해서도 장황한 반박의 글을 보냈으니까. 그러나 직접 대면하면 다를 지도몰랐다. 과거에 알던 형의 모습처럼.

공항에 마중 나온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고 했다. 나는 해럴드 형의 숨겨진 부분에 대한 진상을 들었다. 해럴드는 주일이면 불과 유황에 대해 설교했고, 미국의 친구들한테 편지로 저주와 심판에 관한 장황한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비좁고 곰팡내 나는 그의 집에서 그는 포르노 센터를 운영해 왔다. FBI 특별 기동대 팀이 집을 포위한 뒤 강제 진입해 수갑을 채우고 해럴드 형을 감옥으로 끌고 갔다. ‘음란죄로 체포된 설교자’ 사건은 그날 저녁 뉴스 시간에 나왔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무엇보다 슬픈 것은 헤럴드 형에게 은혜의 조짐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는 것이 도덕밖에 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순수 세력과 불순 세력으로 깨끗이 양분되며 그는 그 반경을 점점 좁혀 가다 결국 자기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다 이젠 자기마저 못 믿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난생처음 은혜 외에는 갈 곳 없는 처지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는 은혜로 돌아서지 않았다. 오점이 있더라도 도덕이 훨씬 안전한 장소로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눈에 비치는 기독교인들의 이미지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고, 자기네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은 잘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네 삶에도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아마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에서 천주교인이나, 불교도에 비해서 개신교 기독교인의 호감도는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의 시각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신앙생활에 임하는 우리의 관점,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에 대해서 극단적인 두가지 오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하나님을 너무 자유롭게 생각해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각양 나쁜 짓을 다하면서 교회에서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재미있게 사는 꼴을 도대체 보지 못하는 분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뭐 잘못하나 지켜보고 있다가 잘못하면 우리를 혼내는 그런 하나님.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미를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짜 재미를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은 가정을 주셔서 가정의 기쁨을 주신다. 그분은 일을 통해서 느끼는 성취감과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부관계를 통해서 성적인 기쁨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사건만 기억하는데,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동산의 모든 실과를 임의로 먹되” 다른 말로 하면 마음대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먹는 즐거움도 주셨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정의 즐거움도 주시고, 시와 그림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기쁨, 감상하는 즐거움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진리는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것이 우리 교과서에서 발견되든, 경험에서 발견되든, 어디에서 발견되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뜻이다. 이에 덧붙여 저는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의 즐거움이라 믿는다. 그것이 참된 즐거움이라면, 죄악된 즐거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다.왜냐하며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C.S. 루이스는 “기쁨에 놀라다”(Supprized by Joy)라는 책을 썼다.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구도의 과정을 써내려가면서 맨마지막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라고 결론내린다. 루이스는 즐거움은 하나의 표지판과 같다고 설명한다. 산을 헤메다 표지판을 만나면 너무 즐겁고 기쁘지만, 표지판 자체는 목적지가 아니다, 목적지를 가리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생의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이땅에서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선가 더 궁극적인 즐거움이 있고, 완전한 기쁨이 있다는 표지판이라는 것이다. 이땅에서 먹는 즐거움, 노는 즐거움, 일하는 즐거움, 가정의 즐거움, 우정의 즐거움, 각종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아니다. 어느 즐거움도 완벽한 즐거움이 없다. 어디엔가 이 땅이 줄 수 없는 참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찾게 된 계기라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복음은 한마디로 기쁨의 복음, 다른 말로 희락의 복음이다. 빌립보서는 특히 이 주제를 다루고있다. '기뻐한다' '기뻐하리라'고 하는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온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기뻐하라(2:17,18)"

하나님은 희락의 하나님이다. 복음은 희락의 복음이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 실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있다면 우리 환경이 기뻐할만한 환경이 아니라는데에 있다. 우리 환경은 불평스러운 환경, 원망스러운 환경들일 수 있다. 짜증나는 일들도 많고, 내가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도 많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가 기뻐하지 못할 만한 사건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기쁨은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다. 고난 속에서도, 실망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시고자 한다. 이것이 복음의 매력이다. 이 세상은 환경적인 기쁨을 줄 수 있다. 돈이 많이 모이면 기뻐할 수 있고, 성적이 좋으면 기뻐할 수있고, 자식들이 잘되면 기뻐할 수 있고... 이것은 기뻐할만한 환경이 되니까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경적인 기쁨이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것은 환경이 안되는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주시려고 한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즐거워한다>고 표현했다. 이 세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다. 환경이 좌우되지 않는 기쁨이 있다.

그 한가지 예가 바로 바울 자신이다. 그는 기독교 선교를 하다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는 감옥에 갇혔고, AD 66년 네로 황제에 의해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그런데 그는 이 빌립보서에서 줄기차게 얘기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다. 환경적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데도 우리들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셨다.

사실 빌리보 교인들은 처음부터 이 희락의 복음을 경험했다. 주후 52년경, 제 2차 선교여행 때의 어느 날 밤, 사도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별로 없고 회당도 없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는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준 것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힌다. 아무 죄도 없이, 다만 그 여자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한 가지 일로 매도 많이 맞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 감옥안에서 찬송을 불렀다. 빌립보서 4:6-7에 보면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이란 뜻이다. 내 환경을 보면, 내 사건을 보면, 내 가정을 보면, 내 문제와 상처를 보면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 속에 여전히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예수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쁨이요 평안이다. 성경은 이런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 바울은 이런 감사와 평안과 기쁨을 경험했다. 그래서 빌립보의 감옥에서 억울하게 매맞고 갖혔지만, 거기서 그는 한 밤중에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찬송 중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바울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가족들에게 다 침레를 베풀게 되었고, 이것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처음부터 바울을 통해서 희락의 복음을 경험했다.

얼마전 저는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대충 일을 보고나서 한 5일간은 어디 수양관 같은데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책을 보면서 지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오두막>이란 책이 있다. 작년에 서구 기독교권에서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였는데, 마침 번역이 되어서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맥 필립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맥의 가족은 하나님을 믿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날도 맥은 아이들을 데리고 야영을 즐기고 있었고 처음에는 모든 게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찮은 사건 하나가 가족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을 몰고 왔다. 게이트와 조시가 타고 있는 카누가 뒤집히면서 맥은 정신없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호수에 뛰어 들었고 물속에서 나온 후로 어린 딸 미시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미시의 행방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사당국은 미시의 행방불명이 최근에 일어난 유아연쇄살인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사건의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숲속 낡고 작은 오두막에서 미시의 옷과 핏자국만이 죽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맥은 절규하고 분노했다.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는 한 번도 옆에 계시지 않는군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고 지금은 맥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작은 생명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정 말 하나님은 선한 분이실까? 왜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을 멸하시지 않는 걸까? 왜 그토록 맥에게 고통을 주시는 걸까? 하나님은 아들 예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던 분아니던가! 맥은 그날 후로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 생각했다. 마 구잡이로 뒤섞인 선과 악이 침묵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도 멈추지도 않은 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날과 함께 늘 공존하고 있었다. 그렇다. 오두막..... 미시가 마지막으로 생을 끝냈을 그 어둡고 차가운 끔직한 오두막.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보다 더 끔직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미시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했건만 지친 기다림은 끝도 없는 기다림이 되어 가족의 숨통을 조여 놓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날 하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만약에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만약에 아이들을 카누에 타게만 하지 않았어도 만약에 그 전날 출발만 했어도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책감은 더욱 깊어져갔다.

그런데 어느날 매켄지의 우편함에 편지 한통이온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맥은 주변에서 파파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파파”라고 부르는 것외에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편지는 살인자의 작품일까? 아니면 진짜 하나님의 편지일까? 결국 그는 오두막이 부르는 강한 자성에 이끌려 악몽의 본거지인 그곳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옛일이 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딸아이가 살해된 장소인 오두막을 보자 마음의 지하실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감정이 통제할 수도 없을 만큼 하나님을 향한 강한 분노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미시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왜 그토록 잔인하고 고통스런 벌을 받아야 했단 말인가! 맥은 미친 듯이 오두막을 노려보며 하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순간 자살 충동을 느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그의 눈앞에 파파(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나타났던 것이다.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와 성령은 각각 인간의 형태로 출현한다. 하나님은 덩치가 큰 흑인 여성으로, 예수는 중동에서 온 노동자, 그리고 아시아 여성인 성령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등장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맥은 당황스러워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기 마음 속에 있었던 고통과 분노를 치유해 나간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느낀 것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 틀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하나님께 나가는 내 모습이 너무 경직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너무 딱딱하게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알게 모르게 이 세상의 인습과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니까 때로는 하나님도 원망스러울 때가 있고, 인생이 불평스러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내 생각을 초월한 모습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 계셨고,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책에서 맥은 딸아이의 죽음을 계속 <거대한 슬픔>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거대한 슬픔도 하나님이 안에서는 <거대한 기쁨>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1에서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한다. 과거의 바울을 생각해보라. 그는 한때 가장 극렬한 기독교 반대자였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박해자였다. 종교경찰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그가 어느날 변화되어 이제는 <예수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이런 복음을 믿고 싶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이었든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 우리의 어떤 슬픔도 완전한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 이 희락의 복음, 이 기쁨의 복음을 믿고 싶다. 그래서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기쁨의 삶을 살게하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목격하고 싶다. 우리 교회에서 이 희락의 복음 때문에 자신들의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하며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주말에 맥은 삼위 하나님과 깊은 대화와 토론을 나누면서 서서히 치유된다.

나는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일지라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는데,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해주실 수 있는데 해주지 않은 것,

그 거절이 저에게는 가장 큰 상처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사람에게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더 화가 납니다.

복음서에 가득한 기적은 그때뿐인 기적이었나요?

기적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으로 막을 내리고

이제 유효한 것은 내게 요구하는 온갖 계명과 율법들뿐인 겁니까?

‘맥’이 찾아간 ‘오두막’에서 삼위 하나님을 맞닥뜨렸을 때, 나도 모르게 원망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책을 읽기 바로 직전, 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외면하셨기 때문이다. ‘맥’을 따라 좇아간 ‘오두막’에서 이렇게 실재적인 하나님을 마주할 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미안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적어도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삼위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오두막’ 안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지 않은 채, 묻어둔 나의 상처가 다시 건드려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의 방식대로 알아서 처리하고 겨우 진정하고 있는데,

결과를 바꿔주실 것도 아니면서,

왜 상처의 한 가운데로 나를 부르십니까.

잔인하십니다.

더구나 내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친근하고 인자한 모습이라니!

나는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엿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두막]의 저자인 월리엄 폴 영은 부모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뉴기니에서 자랐고, 그곳 원주민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다고 소개된다. 그런 월리엄 폴 영에게 ‘오두막’은 모든 비밀, 아픔, 치욕적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속 깊은 곳을 상징한다고. 나는 이 소개 글을 읽자마자 흠칫 놀라 내 마음 안의 오두막이 안전한지 확인했다.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놀란다. ‘내 안에도 오두막이 존재하는구나!’ 잊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집 짓고 살고 있는 은밀한 고통들. 나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비밀스런 오두막을 안전하게 숨겨둔 채, 단지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의 이야기 안에는 이러한 ‘오두막’이 실재한다. ‘맥’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매켄지’에게 ‘오두막’은 사랑하는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장소이다. 즉, 그의 ‘거대한 슬픔’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맥은 ‘파파’(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파파’라고 부른다)로부터 쪽지를 받는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이 장난 같은 쪽지의 진위를 맥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오두막’을 찾아간다. 마침내 그가 찾은 ‘오두막’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쪽지보다 더 황당한 세 사람과의 만남이다. ‘파파’(성부 하나님)와 ‘예수’(성자 하나님)와 ‘사라유’(성령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은 그들과의 교제 가운데로 맥을 초대하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나는 구약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대면하고자 하실 때에는 ‘원점상황’,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사막)로 그의 백성을 불러내신다고 배웠다. 하나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곳, 그리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상처를 재료로 스스로 마음 안에 지은 집, 하나님과의 대화를 거절한 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와계셨다. 더 달아날 데도 없고, 숨을 데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바로 나의 가장 은밀한 그곳에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사람이든, 부정하는 사람이든 살면서 한 번쯤은 신에 대한 실망을 경험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와 불행은 신,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 설교가, 철학자, 저술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왔고 답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여러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과 ‘맥’의 대화를 통해 지금 내가 얻은 대답보다 역동적인 답변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학적 이론을 초월하면서도 논리적이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면서도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삼위 하나님을 알 때, 그분의 일하심을 이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의 경험에 의하면, 치료와 자유함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비로소 나와 내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맥은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한다! 맥이 경험한 치유와 자유함의 신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경험한 치유의 신비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에게 부어지는 자유와 평강의 충만함! 그는 아신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신다. 내가 겪는 고통과 쓰라림을 아신다. 그분이 아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사랑과 손에 잡힐 듯한 실재적인 소망 가운데 내 안의 상처에 새살이 돋고, 오두막은 막 피어난 꽃향기로 가득한 정원처럼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그것은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신비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을 향했던 나의 원망과 분노 위로, 예수님을 욕하며 죽어간 좌편 강도의 모습이 겹쳐진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고 고통 가운데 죽으신 예수님.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역사였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 예수님께 끊임없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해보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오두막]을 읽은 사람들이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치유와 용서와 자유를 선물하는 축복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하는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오두막지기가 되고 싶다. 그 은밀한 [오두막]에서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대답임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영혼은 [오두막]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한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나를 위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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