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말씀은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Passover”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유월절 엿새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유월절>이란 표현은 어떤 중요한 사건이 유월절에 발생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3장 1절에서도 <유월절 전에>라고 말함으로써 ‘유월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4에 다시 유월절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그리고 16절을 보십시오.
16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었던 유월절 명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유월절>이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유월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에 <유월절 엿새전에>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 엿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의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마지막 행보를 옮기십니다. 12-13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12: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늘은 종려주일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결국 예수님은 이 주간의 마지막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 주간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무겁고 힘든 한 주간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힘겨운 길이었고, 그 고난의 주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무서운 고난의 주간에 앞서 예수님께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드린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이 바로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있던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정을 통해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셨습니다. 이 가정을 통해 사랑을 받고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정을 통해서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를 향해 담대하게 나가셨습니다.
요즘 참 어렵다고들 합니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평범한 한 주간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한 주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지루한 한 주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살고 싶고 붙잡고 싶은 한 주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평범한 한 주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눈물로 지새우는 한 주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의 가정이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가정이 그런 기쁨을 예수님께 드렸듯이, 또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에게,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격려를 주는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가정은 어떻게 이런 기쁨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또 우리의 가정이 이런 오아시스 같은 가정은 어떤 모습의 가정일까요?
1. 감사가 있는 가정입니다.
나사로는 11장에서 병들어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이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아마도 그 이후의 나사로의 삶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이제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새로운 기회” 혹은 “두번째 기회”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어떤 의미에서 “덤”으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셔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용서함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이유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면, 이제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음 받은 우리를 지금 당장 데려가셔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우리를 살게 하심은 “덤”으로 주신 것입니다. 보너스입니다.
나사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언제나 감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1:2에 보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의 잔치는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 큰 위로가 격려가 되었습니다.
오아시스같은 가정은 감사가 있는 가정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서로에게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서로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샘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자녀들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이곳생활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감사할 조건이 없다고요?
그러나 때로는 전혀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감사하지 않을 일로 감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 세월이 흘러가며 머리카락을 잃어버리고 대머리가 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전광씨가 지은 ‘평생 감사’라는 책에 보면 대머리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무려 여섯 가지나 된다는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대머리는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해야 한다.
2.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이다.
3.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다.
4.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다. 엘리사도 대머리였다.
5.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다.
6.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린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이다.
감사가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2. 섬김이 있는 가정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마리아이고, 또 하나의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마르다가 나올 때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마르다는 음식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불평이 있긴 했지만, 마르다는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가 마리아 때문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음식준비하는 것 때문에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는다고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마음에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소연했더니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시면서 네 마음이 “분주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섬기는 태도를 경고하신 것이지, 이 여인의 섬김 자체를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섬김”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며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게 되는데,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혹은 선생이라 부르는데, 좋다, 나는 너희들의 주와 선생이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들을 발을 씻겼던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어라” 예수님이 먼저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섬김 자체를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정의 섬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강조하는 것 한가지가 손님대접아닙니까? 이렇게 섬기고 대접하다가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섬김 뿐 아니라, 가족들이 서로를 섬겨주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은 오아시스 같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가정이 각박해지는 이유는 모두 섬김받기 원하지 먼저 섬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접받기 원하지 먼저 대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섬김받기만을 원하면 가정이 지옥같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먼저 상대방을 섬겨주면 가정은 천국 같은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모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먼저 간 곳은 지옥. 지옥은 불구덩이와 고통의 절규가 넘칠 것 같았는데, 막상 본 지옥은 의외로 평안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두가 무지 긴 젓가락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두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지만 어른의 팔보다도 두배가 넘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모두들 있는대로 찡그린 채로 먹는데에 모든 정신을 쏟아 부었지만 입에 넣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허기짐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옥을 둘러본 이 사람은 얼른 천국을 보고 싶었습니다. 안내하는 천사에게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바로 옆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생각보다 천국이 가깝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천국이 지옥과 별다른 것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천국에 있는 이들 역시 자기 팔보다 두 배는 긴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달랐던 것이 있었다면 그들 모두는 나름 배부르게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는 것.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음식을 집어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섬겨주는 가정이 오아시스같은 가정입니다.
3.희생이 있는 가정입니다.
이 집에는 마르다말고, 마리아라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매우 귀한 헌신을 합니다. 매우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 향유의 가치는 약 300데나리온, 보통 1년 정도 열심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유대여인들의 평생의 소원은 자신의 결혼식 때 아주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여인의 희생을 비난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낭비다. 차리리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을 뻔 했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일면 이해도 갑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았습니다. 8절에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많이 있다는 말씀으로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의 헌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가 아무리 헌신해도, 아무리 희생해도 그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도 공부에서도 수석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의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캠퍼스 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 그리고 돈과 명예,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C. T.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거기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헌신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의 희생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희생은 예수님께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여인의 희생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 직전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희생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요? 이 여인의 희생은 예수님의 마음에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아시스같은 가정은 희생할 줄 아는 가정입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헌신할 때, 삭막한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1982년 로마 교황청 앞에 교황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였습니다.
1941년의 일입니다. 한 명의 수인이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나치는 본보기로 10명의 수인을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불려나오는 사람은 물조차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아사(餓死)감방 행입니다. 사람들은 아사 감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알기 때문에 공포에 질렸습니다. 무작위로 처형자가 불려나와졌습니다.
10명이 다 불려졌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내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꼴베 신부는 천천히 수용소 소장 앞으로 나서면서 "나를 대신 죽여주시오. 나는 딸린 가족이 없소. 저 사람 대신 나를 보내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수용소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런 청을 하자 쾌히 허락했습니다. 이 때 꼴베 신부의 나이는 47세였습니다.
아사 감방에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속옷을 입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먹을 것은 물론 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살아날 희망은 조금도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서는 완전히 짓밟혀버렸습니다. 꼴베 신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며, 동료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망가진 마음을 받쳐주며,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 전까지 아사 감방에서는 절망과 고통,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뿐이었지만, 이 때만은 기도와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9명이 다 죽어 나가고 신부가 최후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17일간 살아남았습니다. 나치는 신부에게 독주사(훼콜산)를 놓아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최후의 한사람이 되어서도 신부는 고결함을 유지했습니다.
이 승리의 소식은 살아남은 수인들에게 전해졌다.
"아우슈비츠에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꼴베 신부의, 사랑의 죽음을 알았을 때,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살자, 끝까지 살아남자.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는 힘이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그 마음의 변화를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아담이라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꼴베신부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닮았습니다. 꼴베신부의 희생이 삭막한 아우슈비츠를 감동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희생당하신 그 십자가는 사막같은 우리의 인생의 오아시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막에 다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이 메마른 땅이 다시 장미꽃처럼 피어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가정을 다시 오아시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