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800년대 중반에 스위스 청년실업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크리스천 사업가였어요. 그는 크리스천 이었지만 여전히 부자 되는 것 밖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기발한 생각 하나를 했습니다.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폴레옹 3세를 만나 프랑스와 스위스를 아우르는 제분회사 수리권을 따낸다면 거의 독과점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서 스위스를 떠나 파리에 도착했는데 마침 전쟁이 일어나 나폴레옹3세는 바로 어제 출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직접 전쟁터까지 찾아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전쟁터에 즐비한 시체들과 전쟁이 끝난 후에 적군과 아군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신음하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시 파리로 이미 돌아갔지만, 이 사람은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상병들의 뒤치다꺼리를 합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 이 사람은 다시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나기로 한날, 오랜 만에 기도할 생각이 나서 기도하는데, 자기가 보았던 전쟁터의 수천의 부상병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기도 중에 위대한 역사적 국제기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제 적십자 위원회입니다. 국제 중립기관으로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고 치료해주는 이 기관을 만든 공로로 앙리 뒤낭은 첫 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됩니다.
앙리 뒤낭의 인생을 바꾼 것은 전쟁터에서 그가 본 참화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비전을 가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 어떤 것이 우리 인생의 새로운 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1절. “내가 본즉”. 이사야는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비전이란 말은 원래 “본다”는 뜻이죠? 그가 본 것, 다시 말하면 그가 가진 비전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새롭게 보아야 되고, 가져야 될 비전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합니다.
이사야가 먼저 하나님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는 먼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1절.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여기 보좌는 왕의 자리, 통치자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분, 역사의 통치자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새해 벽두에 우리도 보아야할 하나님께 대한 비전이 있다면 바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비전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치하시고, 이 세상을 지금도 통치하시고 계시고,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시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구약 다니엘 시대에 바벨로니아 제국을 건설했던 느브갓네살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어느 날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건설한 왕국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사실 그는 당시 최강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을 하자마자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나타났습니다.
단4:31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브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그리고 그 말씀대로 느브갓네살은 사람들에게서 쫓겨나고 들짐승처럼 지냅니다.
단4:32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브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나중에 다시 정신이 돌아오고 권좌를 다시 찾은 느브갓네살 왕은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주
인공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단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브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브갓네살 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진정한 통치자는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다 해낸 것 같아도,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요,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새해를 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열어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비전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통치자, 우리 역사의 통치자,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 역사의 통치자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다윗과 함께 명성을 날렸던 솔로몬 왕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역대상 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2. 거룩하신 하나님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만 본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여기 <스랍>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의 일종입니다. 성경에는 천사도 여러 종류의 천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제일 가까이 모셔섰는 천사들일 것입니다. 이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4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선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히 드러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연기가 자옥한 모습.... 이 모습에서 연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가 십계를 받을 때의 시내 산의 광경입니다. 모세가 십계를 받을 때, 일반 백성들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짐승이라도 가까이 오면 돌로 치라 했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짙은 구름과 어둠이 가득했고, 지진과 폭풍이 일어나 산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조차 무서웠다고 고백합니다. 십계를 받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은 너무나 빛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건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보아야할 비전도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비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가벼운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가벼워져서 우리들의 삶에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하고,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것 갖습니다. 우리시대의 가장 심오한 신학자의 한 사람인 데이비드 웰스라는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설문조사한 후에 현대인의 신앙을 한 단어로 결론내립니다. 바로 “가벼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설문조사자에게 말하는 사람들도 하나님보다 TV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하나님의 명령보다 부와 권력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심판보다 저녁 뉴스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리보다 아부와 거짓이 난무하는 광고의 감미로움을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가벼움이다.”
이어서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거룩함이 복음주의 신앙의 가장 깊은 내면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 예리함을, 우리의 실천이 도덕적인 강렬함을, 우리의 예배가 기쁨에 찬 열정을, 우리의 설교가 은혜의 신랄함을 갖지 못할 것이며 교회는 경쟁 단체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발언권을 얻는 일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공동체에 불과할 것이다”
이사야가 이전까지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로소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눈이 뜨인 것입니다.
2천년 교회사 중에 어거스틴과 함께 우뚝 솟아있는 신학자가 토마스 아 켐피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기독교의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그가 어느 날 묵상기도 하는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의 감격 후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쓴 것은 한 낮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로 아 켐피스는 글쓰기를 멈추고 날마다 성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일 년 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새해에 우리가 가져야할 비전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전입니다.
둘째로, 자신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도 새로운 비전을 가집니다. 어느 부흥사가 교회에 부흥회를 가서 교만하지 말라고 설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가 설교를 다 마치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어느 여신도가 "목사님, 제가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교만한 것을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제가 제일 미인으로 자처하고 공주처럼 굴었는데 오늘 저녁 목사님 설교 듣고 그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여신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성도님, 그것은 교만의 죄가 아니라 착각의 죄입니다" 하시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아야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관점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해리라는 사람은 사람에게는 4개의 창이 있다고 했습니다(Johari window). 자기도 알고 남도 아는 자기 모습, 자기는 아는데 남들은 모르는 자기의 모습, 남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자기 모습, 그리고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자기 모습이 있다고 했습니다.
때로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고 자기에게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비쳐주실 때에만 보이는 자기 모습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서자 비로소 자기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순간 이전에도 그는 왕실 선지자로 활동해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진짜 하나님을 깊이 대면하고 만나게 되자 진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죄인된 자기의 실존입니다.
1. 죄인된 인간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자꾸 다른 데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경향도 많습니다. 자기 잘못된 것이 부모 잘못만나고, 남편이나 아내 잘못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친구 잘못만나고, 사람들을 잘못 만나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짧은 목회를 하면서 내린 결론 한 가지는 “남 탓하는 사람은 절대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에게는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데서 성장이 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기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니까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가 보였습니다. 특별히 그는 자기 입술로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라고 자기의 죄를 보고 회개합니다. 그는 죄인된 자기의 실존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화창한 날, 방안에 햇살이 들어오면서 안보이던 방안의 먼지가 햇살에 의해 보이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만나고, 성령님 만나게 되면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는가? 내 안에 이런 사악함이 있었는가?
1960년, 가장 잔인하게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이스라엘의 비밀첩보원이 남아메리카의 은둔지에서 체포해서 재판을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검사들은 집단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명의 유대인들을 증인으로 소환했습니다.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예힐 디누어는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람이었습니다. 증언하는 날, 디누어는 재판정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방탄유리가 설치된 작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희생자와 살인마의 눈이 마주치자 법정에 일순 침묵이 흐르며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발생한 일은 아무도 예상 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예힐 디누어가 비명을 지르며 마루에 쓰러진 채 흐느꼈던 것입니다. 증오를 억누를 수 없었는가, 소름끼치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는가, 아니면 아이히만의 얼굴에 나타난 악마의 모습에 압도당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미국 CBS ‘육십분’ (60 Minutes)라는 TV 프로에 출연한 디누어는 아이히만이 그가 항상 상상해 왔던 사악한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본 아이히만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디누어는 죄와 악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서글픈 사살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누어는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와 똑같이 그런 잔인한 짓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디누어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회자 마이크 월러스는 TV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고 시청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아이히만과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합니까?..... . 그는 괴물이었습니까? 정신이상자였습니까? 아니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존재였습니까? 아니면 그는 정상인이었습니까?”
디누어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이히만은 우리 모든 인간들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된 우리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지, 우리의 선량한 얼굴 뒤에 숨겨진 우리의 허상과 거짓과 욕심과 질투와 교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선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롬 3:10-15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2. 은혜 아래있는 인간의 실존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죄인된 자기 모습만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자기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속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6-7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환상 속에서 천사는 이사야에게 달려와 이사야의 입술을 벌겋게 달아오른 숯으로 대면서, 선포합니다. 네 죄가 사라졌다. 네 죄는 용서되었다. 죄인된 인간은 감히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천사마저도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죄인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용서를 가르칩니다. 은혜를 가르칩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용납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확신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실상은 죄인된 실상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희생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아빠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바라는 말은 우리말의 아빠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아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는 이 하나님과 좀더 가까이 친숙해지는 한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여러분 마음에 모셔들이지 못하셨다면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예수 믿는 삶은 식탁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친구처럼 내게 다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삶을 기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식탁에 예수님을 초대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작업장에 예수님을 초대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부엌에 예수님을 초대해보셨습니까?
새해에 우리가 보아야할 비전,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전이 자기만 바라보는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변화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즉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세계를 보는 관점은 다양합니다. 세상을 적자생존의 치열한 관점으로 보는 관점도 있고 한 많은 세상으로 보는 관점도 있고, 세상을 오락장으로 보는 관점도 있고, 고통의 바다로만 보는 관점도 있고, 무한한 가능성의 블루오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장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선교의 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이것을 MISSIO DEI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계시지 않습니다. 팔짱끼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으십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일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이사야를 보내시고, 예레미야를 보내시고, 에스겔을 보내시고, 다니엘을 보내시고, 호세아를 보내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시고, 마침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일터에 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을 보십시오.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홍수가 창일 하여 옥상으로 피신한 사람에게 구조선이 와서, '고지대에 옮겨 주겠으니 배에 타라'고 하니, '나는 주님을 믿으니,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사양했다. 물이 뿌려 허리에까지 올라 왔을 때, 동력선이 와서 '고지대에 옮겨 주겠다'고 하니 또 전과같이 사양했다. 마침내는 물이 목에까지 잠기게 되였을 때, 헬리콥터가 와서 밧줄을 내려 주면서 '잡으라'고 하니,'고맙기는 하지만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것이라'고 하면서 거절을 했다. 드디어 '꼬륵'하게 되어 주님 앞에 갔다. "주님 어찌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다.
"구조선을 세 번 보냈으나, 네가 거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일하시고 계시고, 누군가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찾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세 번째 비전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응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