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0.

눅1:46-56 성탄시즌에 기억해야할 단어




교회에서의 주보광고들을 보면 가끔 엽기적인 광고들이 많습니다.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

• 금일 당회장님의 고별 설교가 있은 후 성가대의 특별 찬양이 있겠습니다. 찬양 곡명은 "기뻐 뛰며 노래하라"입니다.

• 다음주에 있을 예정이던 "평화와 화합을 위한 기도회"는 회원들의 의견 충돌로 인하여 취소되었습니다.

• 오늘 아침 갑자기 박XX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같이 유족을 위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찬송가 XXX장 "이런 기쁨 또 어디 있을까"를 부르시겠습니다.

• 다음 주에는 소프라노 이XX 집사의 특송이 있겠습니다. 그 후 목사님께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경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시겠습니다.

• 이번 주일 1부 예배 설교 제목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이고, 2부예배 설교 제목은 "예수님을 찾아서"입니다.

• 다음 주에는 여선교회 주최로 각 가정에서 필요없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판매하는 행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잊지마시고 남편들을 꼭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탄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위 “마리아의 찬가”라고 알려진 찬양이요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성탄의 노래는 사실 엽기적일 만큼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불러진 노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느날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구세주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시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당시 십대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뜻하지 않은 예수의 임신을 두고 혼란에 빠집니다. 사람들의 이목도 문제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결혼을 앞둔 요셉과의 관계였습니다. 이것을 무슨 수로 요셉에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다가 마침 친척 엘리사벳이 생각이 났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통 못났다가 기적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엘리사벳을 만나면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아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사실 엘리사벳도 너무 늦은 나이에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찾아가기까지 숨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서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을 알고는 그를 찾아갑니다.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사가 찾아와서 메시지를 전해주고 갔지만, 마리아는 혼란스러웠어요.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을 만나자, 아무 얘기도 꺼내기도 전에 마리아의 문안인사를 듣자마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눅1:41-42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이것은 마리아에게 큰 확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의 입을 통해서 소식을 알려주셨고, 엘리사벳을 통해서 확신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확신에 이르게 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46이하의 노래내용입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불안을 떨치고 자기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기쁨으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예수 임신은 결혼하지 않은 십대소녀였던 마리아에게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시게 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라는 사실에 그는 오히려 기뻐하며 찬양하는 자리에 이르게되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비슷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를 마음에 모시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것은 일면 매우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내가 예수장이가 되었다고 놀림당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말하면 갑자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줄 수 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부담은 사실 우리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 세상의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마리아도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언된 그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몸을 통해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우리의 성탄시즌에 꼭 기억해야할 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그 단어는 바로 compassion이라는 단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 눅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 눅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마리아는 자기에게 되어진 상황을 생각하면서 ‘긍휼’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긍휼이란 말은 원래 “어머니의 모태, 자궁”을 뜻하는 <라함>단어입니다. 어머니가 품지않고 있으면 죽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린 생명입니다. 제가 학교다닐 때 한번은 낙태에 대해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생후 2주부터 뚜렷이 완벽한 인간의 발모양을 하고 있는 사진도 보았습니다. 동영상으로 본능적으로 낙태기구를 피해다니는 어린 생명의 움직임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모태에서 품지않으면 죽게되는 것이 태아의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어린 생명의 잉태에서 자연스럽게 긍휼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예수를 잉태하고 있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고 있는 하나님의 모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생명일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 하나님이 품지 않으면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인데, 우리들은 우리를 품고 있는 하나님의 품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 각 사람이나,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긍휼이라고 믿습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에 마리아는 “긍휼”이라는 단어를 기억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로 작은 자들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마리아는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두 개의 단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48절의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이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50절의 <두려워하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가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생각들입니다.

비천하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각광받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면 나사렛 동네는 상대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깎아내리는 말 중에 하나는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자면 시골띠기 예수라는 말입니다. 나사렛 출신 마리아와 요셉은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시의 세련된 수 많은 여인들을 제쳐두고 시골 출신의 나사렛 동네의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다시 생각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마리아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마리아가 임신을 했잖아요. 이것은 스캔달입니다. 지금도 스캔달일수 있는 사건인데 얼마나 봉건적인 그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커다란 스캔들이였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스캔달이 아니에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건이였습니다. 그 당시 이런 어린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은 그 소녀를 죽여도 그 사회는 무관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을까요?

이것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수모? 사람들에게 받아야할 손가락질? 그 혐오와 그리고 수많은 그 비방의 말들?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어쩌면 잃어야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녀가 겪고 있었든,그 마음에 내제하고 있었든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러한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소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누가복음 1장을 보시면 마리아가 잉태를 하자 마자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눅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제일성이, 무서워말라,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이것은 네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부끄러워할 사건도 아니고,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야. 너는 구세주 메시야를 낳을 꺼야.

나 같은 계집종을 주께서 찾아오시고 그리고 나를 쓰시겠다고, 이것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사건이 아니라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다가오시고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 메세지를 주시는 그 순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마리아는 무얼 느꼈을까요? 하나님이 정녕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겨주셨는지.

하나님은 작은 자를 품어주시는 긍휼의 하나님닙니다. 낮은 자를 품어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세상에서는 무가치해보이는 사람들을 가장 귀하게 바꾸어놓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황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신분은 이러하니까? 내 학력은 이러하니까? 내 실력은 이러하니까?.... 이런 것들 때문에 삶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 낮은 자들을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혹시 두려워하지 않나요? 앞이 잘 안보이는 상황 때문에 불안해 하지않습니까? 마리아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속에 있는 우리들을 그대로 품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두 번째로, 등을 돌린 자들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마리아라는 한 개인만 품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께 끊임없이 등을 돌린 이스라엘도 품어주셨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눅가복음 1: 54-55.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사적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다른 것들을 섬겼습니다. 때로는 바벨론, 헬라, 로마의 통치를 받게끔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노래하는 것은 이런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끊임없이 등을 돌리는 우리들을 여전히 품고 계시는 긍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아닙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간절히 찾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살만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의 습성입니다. 마치 우리들은 건망증 환자와 같습니다.

수년전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 위스컨신주의 Mr.Stillwater씨의 이야기가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린 남편은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합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날 남편이 아내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하자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번 남편이라고 부를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그러나 한가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것-그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셋째로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음 마리아에게 잉태사실을 알렸을 때에, 아이의 이름을 두 개 알려주셨습니다.

•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먼저 예수란 뜻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바보들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한 복판 밀밭에는 수박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수박들을 괴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도 그 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정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미련한 사람들아 나를 보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밀밭으로 돌진하여 수박을 쪼개 먹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저 괴물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자가 우리까지 살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건초 갈퀴를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러나 또 한 여행자가 이 마을에 들어서 이런 마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그는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설득하고 가르쳐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 수박을 먹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이 바로 긍휼의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죄인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세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그도 함께 겪으셨습니다. 생각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실 이유가 없는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는 너무나 가시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죄이니된 못된 습성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와서 쉼을 얻기 보다는 상처받고 나만 만나면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죄인된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성탄은 임마누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게 모나고 가시가 많은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 에베소서 2장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벧후1: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주어졌고 또 우리가 그를 믿으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인지요.

여러분과 저가 구원 받은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긍휼때문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으세요?

그렇다면 죄인된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기댈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바로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묘비에 뭐라고 썼느냐구요?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저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주여 나에게 베푸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나는 저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마지막 유언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복음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성탄의 시즌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단어는 긍휼입니다. 작은 자들을 품어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자라도 용납하시고 사랑해주십니다. 등을 돌린 자라도 품어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주시는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죄인된 우리들에게 임마누엘 함께 하시며,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긍휼의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관련 설교들:::

설교주제들